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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l 12. 2024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이곳의 학생들을 연령대로 보면 20대가 가장 많다. 그들은 이력서에 적을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 혹은 호주나 캐나다 등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 전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곳에 온다. 그다음으로 많은 건 30대인데, 그들은 대부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진로를 고민하며 이곳에서 영어를 배운다. 부모의 도움으로 이곳에 오는 20대와는 달리 자신들이 힘들게 번 돈을 들여 이곳에 온 30대는, 그래서 20대 보다 더욱 진지하고 열심이다. 그다음의 비율을 차지하는 건 60대 이상이다. 은퇴 후 넘치는 시간과 그간 모은 충분한 돈이 있는 그들은 이곳의 어느 누구보다도 여유롭다. 한창 일할 나이인 40, 50대는 아무래도 수가 적다.


   국적으로 보자면 일본 학생들이 가장 많다. 그 뒤를 한국, 대만, 중국, 베트남 학생들이 따른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몽골에서 온 학생들도 있고, 겉으로 보기엔 정말 영어를 잘할 것만 같은 서양인 모습의 러시아 학생들도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는 것에 너그럽다. 같은 방을 쓴다고,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같은 테이블에서 앉아 밥을 먹었다고, 혹은 그냥 지나가는데 말을 걸었다고 친구가 된다. 이곳에 온 목적이 애초에 영어를 쓰기 위함이고, 영어를 쓰는데 가장 좋은 건 영어로 대화할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이니 이곳에서는 말 그대로 서로 옷깃만 스쳐도 친구가 된다.


   주말이 되면 학생들은 분주해진다. 평일, 학원에 갇혀 있는 동안 쉽게 사귄 친구들과 세운 주말 계획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근교의 섬이나 해변으로 일일 투어를 가기도 하고, 시내에 있는 쇼핑하기 좋은 커다란 몰도 좋다.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은 구글맵에 평점 좋은 식당을 찾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학원 바로 앞 치킨집이라도 간다. 사실 어디를 가든 상관은 없다. 외국인 친구들과 하루종일 붙어 다니며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Lily 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에 온 30대 일본인이었다. 그룹수업에서 자신의 이름을 Yuri 라고 소개했는데 이미 같은 이름을 갖은 다른 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급히,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Lily 로 하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하며 일본인답게 과한 사과를 했다. 이후로도 Lily는 사소한 일에도, 그러니까 수업에 조금 늦는다거나, 강사의 질문에 답변을 잘 못할 때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를 남발하고, 감사합니다, 를 말할 땐 very much 를 반드시 붙인 다음 다시 한번 더,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수업 시작 전, 강사를 기다리는 뻘쭘한 시간을 무마하려 학생들은 어제 저녁엔 뭐 했어? 등의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데, 한 번은 나와 가까운 자리에 있던 Lily 가 주말에는 뭐 해? 하고 먼저 물었다. 아직 아무런 계획 없어, 넌 어때? 하고 되물으니 Lily 도 별다른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럼, 주말에 밥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말하면 바로 친구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보거나 들은, 서로 친구가 되는 과정들을 분석해 봐도, 이 타이밍보다 완벽할 순 없다. 외국인 친구들과 영어로 말하는 게 괜히 두렵고 불안해 2주 내내 숨어 지내던 도서관에서, 1인실의 방에서 이제는 뛰쳐나올 때가 되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럼 토요일 오후에 함께 차 한잔 어때? 하고 물으니 Lily 는 과하게 놀라는 표정과 동작을 지으며 좋아, 괜찮아, 주말이 정말 기대 돼, 하며 반색했고, 먼저 말해 주어서 굉장히 고맙다는 말을 뒤에 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약속한 토요일 오후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만나서 할 말들, 가령 회사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 왜 그만두었는지, 가족이나 친구들의 반대는 없었는지, 등을 묻는 질문을 구글 번역기로 돌려봤다. 그래서 나올 예상 답변과 그에 따라 이어질 말들도 영어 교재에 나오는 다이얼로그처럼 짜깁기해 연습했다. 얼마 전 영어 블로그에서 보았던 ‘내가 살 게.’ 라는 표현도 이번에 한 번 써 보리라. It's on me. 라고 했었지.


   토요일 오후, Lily 를 만나 학원 앞 리조트에 딸린 카페로 갔다. 내가 플레인 요거트를 먼저 고르고, Lily 가 망고 셰이크와 딸기 셰이크를 두고 고민하다 망고 셰이크를 골랐을 때, 서둘러 지갑을 꺼내 들고 Lily 보다 먼저 앞에 섰다.

   “It's on me."

   한동안 말이 없던 Lily 는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정말로 미안합니다, 하며 몹시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덩달아 당황해하며 It's on me, It's on me, 하다가 엉겁결에 계산을 마쳤다.


   친구만 되면 대화는 절로 되는 줄 알았다. 왜 회사를 그만두었는지는,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를 Lily 에게 몇 번이나 듣고 나서야 물을 수 있었고, 나 역시, 미안합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를 여러 번 하고 나서야 그 답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미안한 상황은 누군가가 입을 열 때마다 계속 이어졌다.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렇게나 미안할 일인가. 말을 많이 하면 영어가 금방 는다던데 이런 걸 말하는 건가. 헤어질 즈음엔 나도 Lily 처럼 Sorry 만큼은 입에 확실히 베어 어느 일본인 못지않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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