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Jul 05. 2024

도망치는 게 살 길

   매주 목요일이 되면 1층 메인 오피스는 찾아오는 학생들로 분주해진다.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수업 스케줄을 변경할 수 있는 날이 목요일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수업을 바꾼다. 수업 내용이 너무 쉽다며, 혹은 너무 어렵다며, 때로는 여러 다른 강사를 경험해 보고 싶다며 메인 오피스를 찾는다. 식당 줄을 서는 게 싫다고 점심시간, 저녁시간 바로 전 수업을 Self Study 등으로 바꾸기도 한다.


   개인수업을 바꾸는 이유는 그룹수업의 경우보다 좀 더 개인적이고 사소하다. 하루 45분씩 매일을 좁은 강의실에서 단 둘이 얼굴을 맞대야 해서인지 별 것 아닌 흠으로도, 가벼운 불만으로도 수업 변경을 고민한다. 그 흠과 불만은 학생마다 제각각이다. 말을 너무 많이 시키는 게 흠이 되고, 말을 너무 시키지 않는 게 흠이 된다. 틀린 문법으로 말하는 걸 지적해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갖고, 자기 말을 끊고 계속 지적질을 한다며 불만을 갖는다. 강사가 게이인 것도 수업 변경의 이유가 되고, 강사의 나이가 많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한 번은 친해진 강사에게 학생이 수업을 바꾸면 불이익이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왜? 내 수업 바꾸려고? 하고 묻더니 아무런 불이익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바꾸라고 했다. 그래도 학생이 수업을 바꾼다는 건 무언가 너에게 불만이 있다는 거니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잖아? 하고 물으니, 어쩔 수 없지, 그게 학생의 권리인 걸, 그래도 미리 이야기만 해 주면 괜찮아, 아무런 말도 없이 다음 날 학생이 바뀌어 있으면 조금 당황스럽긴 하거든,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첫 일주일 동안 Rose 가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은 ‘Why?’ 였다. 가벼운 질문에 답변을 하고 나면 Rose 는 어김없이 Why? 하고 되물었다. 영어는 왜 배워? 하는 물음에, 여행 다닐 때 외국인하고 짧게라도 몇 마디 나눠보고 싶어서, 하고 답하면 Why? 하는 식이다. 저녁엔 뭐 할 거야? 하고 물어서 도서관에서 공부할 거야, 얘기해 줘도 Why? 하고 되묻고 어떨 땐 How are you today? 해서 Fine thank you and you? 했는 데도 자기는 어떤지 답은 안 해주고 Why fine?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당황해서 Because... 를 먼저 내뱉어 놓고는 Rose 의 눈을 피했다.


   넌 왜 자꾸 왜라고 물어? 하고 반항해도, 네가 호기심 많은 4살도 아니잖아, 하고 달래도, Rose 의 ‘Why?' 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왜? 왜? 거리는 4살짜리 아이의 부모처럼 넋이 나간 채 수업 시간 45분이 빨리 지나가기 만을 바랐다. 수업이 끝나고 좁은 강의실을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Why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난 어차피 말 배우러 온 거고 Rose 는 강사답게 계속 말을 시키는 것일 뿐이니 괴로운 수업시간이 Rose 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쉬운 답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 미천한 영어 실력 탓이라고,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Why? 라며 되묻고 나의 답변을 진득하게 기다려주는 Rose 는 냉정하고, 무뚝뚝하고, 인정사정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고, 평생 눈물 한번 흘려 보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강사로서는 나름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2주 차가 되면서 나를 향한 Rose 의 칼 끝은 더욱 매서워졌다. Self Writing 시간에 공들여 써온 글을 수업 시작부터 빨간펜으로 유린한 Rose 는 미리부터 준비한 듯한 질문을 불쑥 꺼냈다.

   “현재 너의 나라에 당면한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뭐야? 답변 준비 하는데 5분 줄게.”

   당황이 먼저 왔고 울컥은 나중에 왔다. 한국어로도 어려운 주제를 영어로 답하라고? 진심으로 내가 그 답을 5분 만에 영어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취미가 뭐야?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같은,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한 질문도 많은데 꼭 이래야만 해? 라며 분노를 표하고 싶었지만, 그런 감정을 전달하기엔 내 영어 실력은 너무나 미천했고, 난 이 말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No! 10 minutes!!”


   수업이 끝나고 길게 늘어진 식당 줄 끝을 터덜터덜 찾아가면서 이 수업을 바꾸지 않으면 조만간 피 말라 죽을 수도 있겠다는, 좀 더 상냥하고, 좀 더 착한 질문을 던지고, 칭찬도 듬뿍 해 주는 강사를 찾는 게 내가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식당 줄은 쉬이 줄지 않고, 책이 잔뜩 든 가방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수업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수업을 바꾸겠다는 말에도 Rose 는 Why? 라고 물을까. 내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오후 늦게 수업 들으려니 너무 힘들더라. 수업 끝나고 저녁밥 줄 길게 서는 것도 괴롭고. 그래서 말인데, 11교시 너 수업을 Self Study 같은 걸로 바꿀까 봐. 절대 네가 맘에 안 들어서는 아니고, 너 수업 정말 재미있고 좋은데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참 아쉽고 그러네... 를 구글 번역기로 돌려봤다. 조금 구차한가. 좀 더 쿨하게 가야 하나. 근데, Rose 의 서슬 퍼런 눈빛을 견디며 내가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