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으로 향하는 비행기 시간은 밤 9시 30분이었다. 아내와 이른 저녁을 먹고 석 달 치의 짐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얇게 입은 나의 옷차림을 보며 연신 걱정을 늘어놓았다. 2월이면 아직 겨울인데 왜 두꺼운 점퍼를 입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석 달 있을 필리핀은 여름 날씨잖아. 공항버스 타러 가는 길 10분만 참으면 되는 데 뭐.”
아내는 어차피 공항까지는 따라가니 자기가 집에 돌아올 때 들고 오면 된다고 했지만,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정말 10분만 참으면 되는데. 사실 짐에서 신발 하나 덜어 낼 요량으로 맨발에 슬리퍼인 필리핀 룩으로 가려했는데, 아내 눈치에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석 달, 내가 필리핀에 있는 동안 아내는 부산에 혼자 남아야 한다. 함께 가면 좋았겠지만 어학연수만큼은 각자의 일정과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어학연수 갈 곳으로 아내는 발리나 말레이시아 쪽을, 난 필리핀 쪽을 원해 처음부터 의견이 갈리기도 했거니와 어느 한쪽이 양보해 함께 떠나더라도 앞선 여행지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영어 대신 둘의 수다만 늘 거라는 두려운 생각이 그런 결정을 하도록 부추겼다. 아내를 만난 이후로 가장 긴, 석 달이나 떨어져 지내야 하는 어학연수 길, 공항 출국장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며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그런 일은 없었고, 서로의 건강을 바라며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필리핀 세부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였다. 입국장을 나와 학원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가이드를 만났다. 그는 오늘 필리핀에 도착하는 학생이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다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 했다. 알고 보니 김해 공항에서 같은 시간,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이었다. 어학연수 일정도 3개월로 나와 같았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도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비행기였다. 낯선 환경에 대한 걱정과 낯선 언어를 배운다는 두려움으로 잔뜩 얼어 있었는데, 나 혼자가 아니라는, 죽더라도 혼자 죽는 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생사고락을 같이 할 전우처럼 느껴졌다.
함께 영어와 싸울 전우는 30대 중반이고 부산의 대학교에서 근무하다 영어의 필요성을 느껴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너무 늦은 나이인 건 아닌지 걱정된다길래, 저는 이 나이 먹어서 여기 오는데요, 저보다 15년 빠른 거예요, 라고 말해 주었더니 나를 힐끗 쳐다봤다. 내 눈가의 주름살과 나이에 걸맞게 탄력을 잃은 피부가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지, 그죠? 괜찮겠죠? 하며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나 설득력이 있었나. 그래도 어디 가서 나름 동안이란 소리를 듣는데.
그의 걱정은 다른 쪽으로 번졌다.
“학원에 도착하면 새벽 3시인데 기숙사엔 어떻게 들어가죠? 룸 메이트들 다 자고 있을 텐데.”
그의 젊음에 괜히 심술이 났다. 듣기 좋은 말은 해주는 건 아까 한 번으로 충분하다. 난 늙었고, 그래서 속이 좁으니까.
“그러게요, 다들 잘 테니 불도 못 켜고, 짐도 못 풀겠네요. 근데 저는 1인실이라 룸 메이트가 없어서...”
내가 신청한 기숙사는 1인실이었다. 어린 친구들은 3인실이나 4인실을 신청해 다양한 국적의 룸메이트를 만나, 이번 주말엔 뭐 해? 오늘 저녁에 치킨에 맥주 한잔? 같은 일상을 영어로 말할 기회를 늘리려 한다던데, 그 어린 친구들이 마흔아홉 먹은 늙다리 아저씨와 치맥을 하고 싶어 하진 않을 테고. 내가 20대였어도 룸메이트로는 내 또래의 친구를 원할 것 같았다. 그들의 또래 친구 한 자리를 뺏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어차피 나도 잠자리가 예민해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설치니 비용이 2배 가까이 비쌌지만 1인실을 선택했다.
하루의 수업이 모두 끝나는 시간은 저녁 6시, 잠들기 전까지 6시간가량을 혼자 있을 방에서 무얼 하나 고민이었다. 이참에 기타나 다시 연습할까? 어반스케치를 시작해 봐도 좋겠는데? 하는 잡생각에 마음이 살짝 두근거리기도 했다. 결국 어반스케치를 담당할 4B 연필과 고체물감, 스케치북은 캐리어에 쑤셔 넣고, 덩치 큰 기타는 MIDI 인터페이스와 함께 어깨에 둘러멨다. 이걸로도 혼자의 시간을 못 메울까 봐 곡이라도 써 보자며 25키 짜리 MIDI 건반까지 추가했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배정받은 1인실로 들어와 챙겨 온 기타와 MIDI 건반, 그림 도구들을 내려놓고 보니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서글펐다. 이것들을 챙겨 온 이유가 내가 음악에 미친 열정적인 사람이어서, 그림이 취미인 고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라니. 새벽 3시에 불을 환하게 켜고 우당탕 짐 정리를 하고, 요란하게 샤워를 해도 잠에서 깰 룸메이트가 없다는 게 마음이 편하면서도 한편으론 울적했다.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늦은 시간, 피곤한 몸, 누구의 방해도 없는 1인실의 넓은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