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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n 14. 2024

난 크리스야. 한국에서 왔어.

   즐기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취미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즐기려는 것뿐인데 긴 시간 반복하고 반복해야 하는 것들, 시간을 다져서 만든 근육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즐길 수 있는 것들엔 흥미가 가지 않았다. 악기 연주가 그랬고, 그림 그리기가 그랬다.


   어쩌다 마음이 동해서, 그러니까 어느 새해 첫날에 괜히 의욕이 넘쳐서, 방에 장식으로 세워 놓은 기타를 꺼내 들고 늘어난 기타 줄을 조이고는 기본 코드 네 개를 반복하기만 하면 되는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불러 본다거나, 그나마 덜 번진 스케치북 뒷면을 찾아 펼쳐 4B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그라데이션 연습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조금만 하면 금세 지쳤다. 타오르던 의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즐기지 못하는 취미는 낡은 버킷리스트 안으로 다시 슬금슬금 들어갔다.


   버킷리스트 안에는 영어도 있었다. 영어는 이따금 한 번씩은 고개를 쳐들고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기타나 4B연필에 비하면 잠잠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버킷리스트에 추가한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에 비해 꽤나 어릴 적에, 그래서 버킷리스트의 거의 첫 번째 줄에 자리 잡은 영어는, 내가 살아온 그만큼의 긴 시간에 눌려 이제는 힘 한번 쓰지 못한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늙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안 해도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는 것들, 그럼에도 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들, 끝내 해내더라도 앞으로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는 것들이 버킷리스트 안에서 지워질 기회를 받지 못한 채 남아있었다. 악기 연주나 그림 그리기, 영어 같은 것들이 버킷리스트의 한편에 굳은살처럼 박혀있었다.




   필리핀 어학연수 3개월의 첫날, 첫 수업은 한국에서였다면 이제 막 깨어나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 시간인 아침 8시에 시작됐다. 6시로 맞춰 둔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정신없이 씻고,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참석 여부와 점수에 따라 저녁, 주말 외출을 제한하는 데일리 테스트까지 마친 후였다. 강의실은 학원 건물의 2층, 열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 찰 작은 방이었다. 미리 와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학생들의 눈인사를 받으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8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30대 중반의 인상 좋아 보이는 필리핀 강사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학원은 주 단위로 졸업생이 나가고 그 자리를 신입생이 들어와 메웠다. 그날 수업에 새로 참여하는 신입생은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라는 강사의 말에 그 친구가 먼저 나섰다.

   “내 이름은 아미야. 일본에서 왔고 나이는 스물셋이야. 이곳엔 2개월 동안 있을 거고, 이후엔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를 갈 거야.”

   영어 초보자라도 쉽게 알아들을 또박또박 정직한 발음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다음은 내 차례.

   “난 크리스야, 한국에서 왔어.”

   나에 관한 정보는 이 정도면 충분해, 더 묻지 마, 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끝냈다. 중년 아저씨의 나이 따위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을 테고, 나중에 캐나다로 간다든지 하는 근사한 계획도 없으니까. 다행히 강사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존의 학생들도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일본인이 셋, 대만인이 둘, 한국인이 하나였다. 모두 20대였다.


   수업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오늘의 진도는 호텔에서 사용하는 영어 표현에 관한 내용이었다. 수건이 더 필요해, 아침에 모닝콜을 해 줘, 호텔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어? 하는 표현들을 강사가 알려주고, 학생이 따라 해 보고, 서로 역할을 나누어 대화를 이어가 보고. 수업 중간에 강사가 각 나라의 호텔은 어떤지, 일본이나 대만이나 한국의 유명한 호텔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물었는데, 한국 호텔에 대해선 수업에 참여한 지 2주가 되었다는 다른 한국 친구가 답했다.


   수업은 45분간 진행됐다. 길게 느껴지던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각자의 시간표에 따라 2교시 수업을 들을 강의실로 이동했다. 사진으로 찍어 둔 시간표에서 다음 수업과 강의실을 확인하는데 일본에서 왔다던 신입생 친구가 말을 걸었다.

   “안녕, 크리스, 넌 여기 몇 주나 있어?”

   “3개월.”

   근데 이 일본인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자기소개 때 많은 이름이 오가기도 했고, 첫 수업이라 긴장도 해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노트에 적어 둘 걸.

   “미안한데, 너 이름이 뭐지? 잊어버렸어.”

   “아미. 에이, 엠, 아이.”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미는 BTS 팬클럽 이름인데, 너 혹시 BTS 좋아해? 하고 말을 더 이어갈까 했는데 쉬는 시간이 짧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어가 짧기도 하니. 이쯤에서 대화를 끊어야 했다.

   “아미, 내일 봐.”


   영어로 한 첫 질문, 이곳에 와서 외국인 친구에게 사적으로 건넨 첫 질문이, 미안한데, 너 이름이 뭐지? 였다. 좀 더 근사한 질문이면 좋았을 텐데. 그렇더라도 그건 그 친구의 이름이 정말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다. 하우아유? 파인 땡큐 앤유? 처럼 오래 외워서 조건반사로 나온 것이 아닌, 궁금해서, 필요해서 건넨, 짧고, 쉽고, 간단하지만 둘의 대화를 이어가는 질문. 첫날, 첫 수업에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버킷 리스트 안에서 긴 시간 잠들어 있던 영어가 드디어 첫 근육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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