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Jun 28. 2024

네 글은 엉망진창이야

   학원에서의 하루는 11교시로 쪼개져 있다. 수업시간은 45분이고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은 5분이다. 1교시는 아침 8시부터 시작되고 11교시를 모두 마치면 저녁 6시가 된다. 하루의 11교시 중에서 강사에게 수업을 듣는 건 8타임, 그룹수업이 4번, 개인수업이 4번이다. 남은 3타임 중 2타임은 셀프 스터디, 셀프 라이팅이다. 셀프 스터디는 말 그대로 자율 학습이고, 셀프 라이팅은 그날그날 주어진 주제로 짧은 영작을 하는 것이다. 셀프이긴 하지만, 강제성이 있다. 도서관에 들러 셀프 스터디, 셀프 라이팅을 빼먹지 않았다는 강사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 이제 남은 1타임, 그 1타임이 꿀 같은 휴식 시간이다. 수업 시간 벨이 울리고 5분이 지나도록 강의실에 가지 않거나 셀프 스터디, 셀프 라이팅 시간에 강사의 사인을 받지 않으면 결석 처리 된다. 일주일 동안 결석을 5번 이상 하면 벌점을 받는다.


   데일리 테스트는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치러야 한다. 강당으로 가 단어와 문법을 묻는 10문항에 답을 적고 제출하면 된다. 그러니 씻고, 아침밥을 먹고 데일리 테스트까지 마무리하려면 늦어도 아침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데일리 테스트를 치르지 않거나 점수가 낮으면 벌점을 받는다.


   수업이 끝나는 저녁 6시 이후에는 외출이 가능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0시 전에는 학원에 돌아와야 한다. 주말은 아침 일찍부터 외출이 가능하지만 역시나 통금시간이 정해져 있다. 외출해서 술을 마시는 건 괜찮지만, 마시던 술이 남았다고 술을 학원에 들고 들어오면 안 된다. 통금시간을 어기거나 술 반입을 시도하다 걸리면 벌점을 받는다.


   어기면 벌점을 받게 되는 규칙은 시시콜콜 많다. 다른 사람의 방에 출입하면, 이성 친구와 애정 행각을 하면, 밤 10시가 넘어서 학원 안을 어슬렁거리면, 학원 담벼락을 넘어 외출을 시도하면 벌점을 받는다.


   쌓인 벌점이 정해진 기준치를 넘으면 저녁 혹은 주말 외출이 금지된다. 까짓거 밖에 안 나가면 된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 룸메이트가, 내 클래스메이트가, 내 배치메이트가 삼삼오오 모여 산뜻한 외출용 옷을 차려입고 왁자지껄 떠들며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학원 안에서 홀로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안 나가는 것과 못 나가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연수 첫날의 마지막 시간, 11교시는 개인 수업이었다. A4 용지에 출력된 시간표에 강의실은 M126호, 강사의 이름은 Rose라고 적혀있었다. 책상 하나와 강사가 앉는 의자, 내가 앉는 의자만으로 공간이 꽉 차는 작은 M126호 강의실에서 Rose 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Rose는 내게, 이름이 뭐야? 어느 나라에서 왔어? 여기 얼마나 있어? 등의 가벼운 질문을 했다. 앞서 이미 7번의 수업을 받으면서 계속 들었던 질문이었고, 나 역시 반복해서 몇 번 대답해서인지 답변에 떨림은 없었다.


   이제 이어지는 다음 질문은 이거일 테지.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어? 영어는 왜 공부하려는 거야? 연수가 끝나면 다음 계획은 뭐야? 결혼했다고? 아내는 왜 안 왔어? 나의 거칠던 답변은 7번의 수업을 거치면서 다듬어져 완성이 되어 있었고, 그중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떨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Rose는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너의 작문 선생이야. 셀프 라이팅 시간에 글은 썼지? 내놔. “


   내가 영어로 쓴 글을 다 읽은 Rose의 첫마디는 ‘It's a mess.’ 였다. mess 가 무슨 뜻이지? 분위기상 좋은 뜻 같지는 않은데. 내가 사전에서 mess의 뜻을 검색해 보는 동안 Rose는 빨간 볼펜을 들고 내 글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mess
1. (지저분하고) 엉망(진창)인 상태
2. (많은 문제로) 엉망인 상황

   엉망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엉망. 엉망진창. 많은 문제. 지저분.


   내가 이래 봬도 글은 좀 쓰는 사람인데. 너는 모르겠지만 브런치라는 곳에서 내 글을 구독하는 사람의 수가 3천이 넘는데. 이거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닌데. 글 써서 책도 한 권 내 본 사람인데. 내 글이 엉망이라니.


   Rose는 충격에 빠진 나에게 자신이 난도질한 부분을 꺼내어 헤집었다. 줄 바꿈을 함부로 하지 마. 글 초반엔 한 명인 것처럼 쓰더니 왜 나중엔 ‘그들’ 로 복수형이 된 거야.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모르겠어. 마침표, 쉼표는 왜 안 찍었어. 명사 앞에 a, the 빼먹지 마. 대문자는 문장 시작할 때만 써. 글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형식과 문법까지. 그러니까 총체적 난국. Rose의 말대로 내 글은 mess였다.




   진이 빠지고 혼이 나간 상태로 첫날 수업을 끝냈다. 사람들에 떠밀려 식당 줄을 서고 메뉴가 뭔지도 모른 채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 들러 하루 동안 쌓인 숙제를 마치고, 방 안에 들어와 멍하니 누워 시간을 버렸다. 이럴 때 시원하게 맥주 한 캔 들이켜면 좋겠는데. 시간은 10시를 향하고 있었고, 지금 맥주를 마시겠다고 밖으로 나가면 통금시간 안에 돌아오긴 힘들 텐데. 통금시간을 어기면 벌점이 몇 점이었더라. 사 들고 와 방에서 마시는 거라면 통금시간은 문제없는데. 맥주 반입을 시도하다 걸리면 벌점이 몇 점이었더라.


   학교를 떠난 지 20년도 더 지난 나이에 꽉 짜인 시간표에 맞춰 강의실을 쫓아다니고 수업을 따라가느라 몸은 지쳤는데, 어떻게 하면 벌점 없이 맥주 한 캔을 마실 수 있을까, 벌점 까짓 거 무시하고 맥주 마시러 나갈까, 이따 다들 잘 때 슬쩍 담벼락을 넘을까 하며 생각이 폭주하는, 그렇게 몸과 정신이 mess 인 채로 밤이 깊어갔다.

    

   

이전 03화 1인실의 넓은 침대에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