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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ug 02. 2024

넌 피와 눈물이 없어

   수업으로 꽉 찬 하루를 견디다 방전 돼버린 몸을 이끌고 매일 저녁 도서관으로 가는 건 역시나 무리였다. 틀어놓은 유튜브 속 영어 강사는 제 혼자 떠들 뿐이고 멍한 정신은 저기 멀리 안드로메다 어디쯤에서 헤맸다. 이따금 떠오르는 잡생각조차도 힘 있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한 두 장면만 기계적으로 반복 재생됐다. 그저 시간만 버릴 뿐이었다. 숨을 쉴 곳이 필요했다. 영어가 들리지 않는 곳, 그래서 영어를 잊을 수 있는 곳.


   학원 앞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곳은 학원생들이 많았다. 옆 테이블, 건너 테이블 모두에서 지긋지긋한 영어가 들렸다. 그건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었다. 구글맵으로 학원 주변을 뒤졌다. 학원에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괜찮아 보이는 곳이 있었다. 한국인 사장이 여행 온 한국인을 대상으로 치킨을 파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위치가 번화가 반대쪽이어서 가는 길에 사람이 뜸했다. 가게 안에는 멍하니 핸드폰을 보는 필리핀 직원 한 명뿐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필리핀 직원은 마치, 어? 웬 손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문한 맥주를 다 마시고 나올 때까지도 그곳에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다.


   다음 날, 어제저녁엔 뭐 했냐고 묻는 Rose 에게 그 가게 이야기를 했다. 내 새로운 아지트를 찾았다고. Rose 는 그곳의 어떤 점이 좋은데? 하고 물었다.

   “그곳엔 나만 있어. 영어가 없어.”

   (그곳은 나 혼자여서 영어 쓸 일이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 엉성한 영어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Rose 는 영어 공부하겠다고 필리핀까지 왔으면서 왜 영어가 없는 곳을 찾냐며 나를 타박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갔었는데, 점점 가는 빈도가 늘어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저녁이면 당연하다는 듯 늘 그곳을 찾았다. 손님은 여전히 나 하나뿐이었다. 여기 곧 망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버텨주기를. 산 미구엘 한 병을 시켜 놓고 어느 날은 웹 서핑을, 어느 날은 유튜브를, 그러다 영어 공부도 좀 해야 되지 않나 싶으면 듣기 실력 향상에 좋다는 미드를 봤다.


   ‘눈물의 여왕’을 보게 된 건 영어 공부하기 괜찮은 미드 없나 하며 넷플릭스를 헤매다였다. ’필리핀의 Top 10‘ 목록에서 1위가 한국 드라마인 ‘눈물의 여왕’이었고 그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1화부터 전개가 폭풍 같았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알콩달콩 연애를 하고, 결혼을 마음먹었는데 여자가 재벌집 딸이고, 이에 부담을 느낀 남자가 결혼을 주저하고, 상관없다는 듯 여자가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하고, 3년 후가 되고, 둘의 관계가 틀어지고, 남자는 이혼을 고민하는데 여자는 3개월 밖에 살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리고. 1화에 이 모든 게 담겼다. 이렇게도 전개가 빠른가. 괜히 한류, 한류 하는 게 아니었다. 괜히 필리핀에서 1위를 하는 게 아니었다. 미드는 개뿔, 역시 드라마는 한국이지.




   요즘 ‘눈물의 여왕’에 빠져 있다는 이야기를 Rose 에게 했을 때 Rose 는 반색했다. 그 드라마 미쳤다고, 여주인공이 너무 이쁘다고, 일주일에 두 편씩만 나와 기다리기 힘들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조금은 의외였다. Rose 는 따분한 다큐멘터리만 볼 것 같았는데. 월요일이면 주말 동안 업로드된 ‘눈물의 여왕’ 이야기를 하느라 수업은 뒷전으로 밀렸다. 질문에 답하는 것 말고는 먼저 말 꺼내기를 주저하던 나도 ‘눈물의 여왕’은 참을 수가 없었다. 백현우와 홍해인이 독일에서 재회하며 눈물을 쏟던, 그 슬픈 장면에서조차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Rose 의 말에

   “넌 피와 눈물이 없어.”

   (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는 식으로, 이전이라면 틀린 문법, 잘못된 표현이면 어쩌지 싶어 다물어 버리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둘은 결국 이혼을 할까? 홍해인은 과연 죽을까? 하는 질문이 수업 교재의 딱딱한 질문을 대신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대화가 아닌, 하고 싶어서 하는 대화들이 오갔다. 그러니까 대화다운 대화는 ‘눈물의 여왕’이 시작이었다.


   대화는 물꼬 터지듯 다양한 주제로 옮겨갔다. 기회가 없어 가난할 수밖에 없는 필리핀 청년들의 안쓰러움을 Rose 에게 전하려 애썼고, Rose 는 내 이른 은퇴를 가능하게 했던 한국 연금제도를 이해하려 애썼다.

   “너와 난 같아. 단지 난 한국에서 태어났어. 내가 한 건 그게 다야.”

   (내가 너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할 순 없어. 다만 운 좋게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너보다 더 많은 기회를 얻었던 것 뿐이지, 라고 말하고 싶었다.)

   Rose 는 내가 하는 어설픈 말들을 모두 잡아내려 했다. 끝내 내 말이 부족하다 싶으면, 혹시 이 말하려고 했어? 하며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내 말에 얹었다.


   서로의 생각과 의견이 오가고 있다. 외국인이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행여나 말을 걸어오면 외면하고 딴청피기 바쁘던 내가 Rose 에게 필리핀을 식민지배 했던 스페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한국은 보수적인 사회라 필리핀처럼 동성애자들에게 관대하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여전히 문법은 안 맞고, 표현은 거칠고, 하려던 말이 한 말과 온전히 같지는 않지만 내 생각을 잇고 의견을 보탠다. 내가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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