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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ug 09. 2024

내게 주어진 삶의 경로

   튀르키예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골목마다 지정된 쓰레기 배출 장소에 플라스틱이니 병이니 종이 박스니 하는 것들을 일반 쓰레기와 함께 버린다. 물론 쓰레기봉투라는 것도 없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버려도 되는 튀르키예의 쓰레기 정책이 심적으로 불편하기도 해서 나름 플라스틱과 종이, 비닐로 나누어 버리긴 했지만 어차피 배출 장소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하나로 뒤섞이니 큰 의미는 없었다.


   그렇더라도 플라스틱과 종이류는 얼마간 돈이 되는지 쓰레기장을 뒤져 그것들만 모아 수거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망태기를 바퀴 달린 수레에 얹어 끌고 다니는 그들은 골목의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플라스틱과 종이를 주워 모았다. 그 조차도 경쟁이 심했다. 바로 조금 전 수레가 한번 훑고 지나간 쓰레기장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수레가 와서 또 훑었다.


   그들이 계속 눈에 밟혔던 건 10대로 보이는 그들의 나이 때문이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을 새도 없이 다른 경쟁자에게 빼앗길 새라 정신없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그들의 처지와 여행자의 신분으로 이곳에 와서 당장 내일의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의 상황이 대비되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런 차이가 마땅할 만큼 나는 저들보다 열심히 살아왔는가.


   생각이라는 것이 처음 생겼을 때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남들처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직장을 다녔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열심히 살았다. 단지 그저 열심이면 됐다. 이미 내게 주어진, 정해진 경로 안에서 열심이기만 하면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즐기며 먹고살 수 있었다. 저들에게 주어진 삶의 경로는 어떤 것인가. 저들은 왜 어린 나이에 하루종일 쓰레기장을 뒤져야 하는 건가. 저들도 저들의 경로에서 열심이기만 하면 나이가 들었을 때 적당히 즐기며 먹고살 수 있을까.




   내 새로운 아지트의 사장은 한국인이었다. 우연히 말을 섞게 된 어느 날, 이곳에 손님이 너무 없어 걱정된다고 하니 오픈 준비 때문에 아직 이렇다 할 홍보를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 곧 홍보를 시작하면 손님이 늘 거라고 했다. 여기서 일하는 필리핀 청년이 무척 친절하고 인상도 좋다 하면서 슬쩍 그의 페이를 물었다. 사장은 그에게 하루에 400페소, 우리 돈으로 만원 가량을 준다고 했다. 그 인상 좋은 필리핀 청년은 오후 5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 가게에서 하루 10시간을 일하고 우리 돈 만원 정도를 벌었다.


   나를 가르치는 몇몇의 강사에게 학원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이가 가장 어렸던 Riri 는 집을 떠나 와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저렴한 숙소를 찾아야 했고 그렇게 찾은 6명이 함께 쓰는 방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Jeff 는 하루에 11교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아무것도 못할 만큼 녹초가 된다고 했다. 미혼모였던 Heart 는 주말,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자신의 딸이 늘 그립다며 핸드폰을 열어 딸 사진을 보여줬다. Rose 는 뭐 그냥 Rose 답게, 그런 건 왜 물어? 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


   20대가 대부분인 필리핀 강사들은 제각각 자신의 꿈이 있었다. Shi 는 공립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해 퇴근 후 밤늦게까지 시험준비를 한다고 했고, Dally 는 필리핀을 떠나 한국이나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고 싶다고 했다. 나에게 유럽에도 가봤냐고, 그곳은 어떠냐고 묻던 Riri 는 부지런히 돈을 모아 10년 후, 꼭 유럽으로 여행을 갈 거라 했다. Rose 는 이번만큼은 왜? 냐고 되묻지 않고, 앞으로도 가족들과 매일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인 스텝에게 들은 그들의 월급은 경력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5,000 페소에서 20,000 페소였다. 우리 돈으로 50만 원을 넘지 않는 돈이었다. 그들은 그 정도의 돈을 받으며 그들의 1년 치 연봉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들여 필리핀 어학연수에 와 있는 자기 또래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들은 자기 또래의 학생들에게 어제는, 혹은 지난 주말에는 뭐 했어? 하고 물으며 자기 일당보다도 더 비싼 저녁을 사 먹고, 자기 주급보다도 더 비싼 일일투어를 다녀온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그들의 한 달 월급만큼의 돈을 카지노에서 잃었다고, 혹은 땄다고 하는 자기 또래 학생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같은 또래이지만 자기와는 다른 삶의 경로를 걷는 학생들을 매일 들여다봐야 하는 건 괜찮은 일일까. 그들 역시 한창 꿈이 많을 20대이지 않은가.


   한 번은 한국인 20대 친구에게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건 어쩌면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자기들은 정말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하루하루를 전쟁같이 사는데도 꿈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고, 지금 한국의 20대의 삶은 현재 기성세대가 누리고 있는 삶과는 다르다고. 그의 생각에 내 말을 더 끼워 넣을 수는 없었다. 그의 말도 옳으니까. 각자의 삶의 경로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튀르키예와 필리핀과 한국의 10대, 20대 젊은 친구들이 Rose 의 꿈처럼 다만 매일매일이 행복하기를. 내일 1교시 수업을 위해서라도 얼른 자야 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뒤척이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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