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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ug 23. 2024

12주는 길었다

   이곳에 오고 첫 4주간은 영어 실력이 늘어 가는 게 눈으로도 보일 만큼, 이렇게 빨리 늘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거침이 없었다. 이런 별것도 아닌 것을 왜 이제야 시작했나, 왜 이제껏 주저하고 외면하기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어가 쉬웠다. 영어 실력이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걸 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 목표로 했던 영어 실력, 그러니까 외국인과의 가벼운 인사, 잡담을 나누는 수준을 뛰어넘어 어쩌면 정치, 경제, 종교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는 경지까지도 가능하겠다는 기대마저 들었다.


   실제로 6주 차로 접어들었을 때엔 대만 친구에게 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고, 졸업하면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던 일본 친구에게 엔화 가치가 떨어져서 고민이겠다며 위로를 했다. 깊이도 없고 하찮기만 한 대화였지만 내가 오늘 중국을 바라보는 대만인의 시선과, 일본의 경제불황이 야기한 일본인의 불안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며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허풍을 치기도 했다. 급기야 필리핀 강사에게 너도 일요일마다 성당 다녀? 하고 물으며 종교에 관한 주제에도 발을 뻗었다.


   국제정세, 세계경제, 종교를 거침없이 넘나들던 행보는 7주 차가 되면서 주춤했다. 쭉쭉 앞으로 뻗어나가던 보폭이 눈에 띄게 좁아졌고 8주 차, 9주 차 때엔 어쩐지 제자리걸음만 계속하는 느낌이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면서 지치기도 했고, 초반에 비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침에 눈떠서 밤에 잠들기까지 하루종일 영어로만 떠들어대는데 어제에 비해, 지난주에 비해 내 영어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에 있는 듯했다.


   영어 실력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어느 순간 한 뼘씩 단계적으로 성장한다던데 몇 주가 지나도록 다음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멈춰있는 중이었다. 나도 안다. 계단을 하나 뛰어넘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기억에 새겨질 정도의 강렬한 경험이나 눈물겨운 노력이 쌓인 디딤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8주 차, 9주 차의 일상을 돌이켜보면 어려운 단어나 긴 문장은 피하고 쉽고 단순한, 늘 써서 익숙한 말만 반복할 뿐이었으니 계단을 뛰어넘는 일은 당연히 일어날 리가 없었다.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만 내려놓는다고 한국에 일찍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진짜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역사, 철학을 영어로 논하는 경지까지 달려볼까 하는 쓸데없는 마음이 일어 이따금씩 몸과 정신이 피폐해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이제 더 이상 힘든 건 싫고, 무엇보다 처음의 목표였던 외국인과 가벼운 잡담을 나누는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하지 않냐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욕심을 버리면 피폐함은 자연스레 치유가 되었다.


   수업에 있어 강사의 의욕은 학생의 의지에 맞추기 마련이다. 말 한마디 더 하려 하고 표현 하나라도 더 익히려 눈을 반짝이는 학생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어쨌든 의사소통을 하고 있잖아, 라며 만족해하는 학생에게 보이는 강사의 의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달라고 하면 주지만, 이제 됐다 하면 굳이 주지 않는다.




   졸업을 한 주 앞둔 11주 차는 평온했다.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나도 저럴 때가 있었더랬지 하며 뒷짐을 지고, 수업시작종이 울리더라도 뛰지 않고 느긋하게 강의실로 걸어가며 여유를 부렸다. Rose 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 넌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빨라, 하며 Rose 탓을 하기도 하고, 답변을 하다 막히면, 네가 내 생각을 읽어 봐, 라며 뻔뻔함을 보이기도 했다. 더 이상 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간인도 아닌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처럼 강사와 학생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서 11주 차를 보냈다.


   쉽게 잡을 수 있는 목표를 들고 오기엔 12주는 길었다. 아직 긴장감이 남아있고 늘어가는 실력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는 4주는 살짝 짧은 듯하고, 슬슬 영어가 지겹고 한국말이 고프기 시작하는 8주 정도가 어학연수 기간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나. 나처럼 기대치가 낮고 작은 성과에도 쉽게 만족하고 못 오를 나무다 싶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12주는 정말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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