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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ug 16. 2024

일탈이 필요했거든


   증상은 8주 차가 끝나면서 조금씩 나타났다. 뭔가를 말하려다 막히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찾아보던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8주가 지났는데도 난 왜 여전히 버벅거리기만 하는가 하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런 답답함이 한두 번씩 쌓이면 아침에 눈을 뜨며 다잡던, 조금만 더 버티자던 결심이 이내 허물어져 버리고 나는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너는 왜 늘상 제자리인 나를 가르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남은 4주 간 이곳에서 할 것들 보다 4주 후 한국에서 할 것들을 떠올리는 쪽이 시간을 흘려보내기엔 더 편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하루는 더 길어져 처음 이곳에 왔던 때보다 8주가 지났는데도 한국으로 돌아갈 날은 오히려 더 멀어 보였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일탈이다. 일탈이 야기한 죄책감이 나를 옥죄도록 내몰면 권태에 빠졌던 어제에 대한 참회를 끌어내고 속죄를 위한 내일을 갈구하게 된다.




   9주 차 화요일은 방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벨소리를 따라 각자의 강의실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학생들을 지켜보다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 누웠다. 그다음 벨소리가 들리면 다시 창가에 서서 복도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급히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는 학생들, 복도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학생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손짓 발짓 다 써가며 수다를 떠는 학생들이 좁은 복도에서 뒤엉켰다. 짧은 쉬는 시간이 끝나고 복도에 있던 마지막 학생까지 강의실로 사라지면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렇게 하루를 버렸다. 하지만 일탈은 하루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음날 아침, 눈 뜨자마자 오피스를 찾아갔다. 지나다 한 번씩 마주치면 어린 친구들과 공부하느라 힘들죠? 하며 내 걱정을 해 주던 한국인 부원장이 오피스 안쪽에 보였다. 그 앞으로 다가가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저 오늘 밖으로 나가야겠어요.”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는 그에게 말을 이었다.

   “외출증 좀 끊어주세요. 병원을 가야 되는 거면 병원 갈게요.“

   이럴 땐 나이 들었다는 게 무기가 된다. 20대, 30대 학생이었으면 씨알도 안 먹혔을 요구에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랩으로 택시를 불러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필리핀의 유물이나 미술품이 궁금해서는 아니었고, 딱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물관의 규모는 작았다. 정말 천천히, 꼼꼼히, 그리고 한참씩 쉬기도 하면서 둘러봤는데 고작 한 시간밖에 버리지 못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몰로 갔다. 사지 않을 옷의 가격표를 들여다보고 먹지 않을 식당 메뉴판을 넘겨봤다. 가장 위층에 아이스링크가 있길래 스케이트나 탈까 잠시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오락실로 들어가 인형 뽑기 기계에 돈만 계속 집어넣었다.


   시간이 가장 잘 버려진 곳은 지하 1층에 있던 마트였다. 진열대 한 면을 가득 메운 한국 라면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이름 조차 모르는 낯선 필리핀 생선들을 구경했다. 한창 수업중일 강사들에게 나눠 줄 초콜릿도 종류별로 여럿 챙겨 넣었다. 저녁은 피자헛에 들려 1인 세트를 시켜 먹었다. 해는 이미 지고 밖은 어두웠지만, 여전히 버려야 할 시간은 남아 있었다. 학원 근처 마사지 샵으로 가 그곳에서 가장 비싼 핫스톤 마사지로 두 시간을 마저 버리고 산 미구엘 맥주가 있는 아지트로 장소를 옮겼다.



   어느덧 시간은 학원 통금시간인 밤 10시, 오전 10시에 학원을 나섰으니 지금까지 내가 버린 시간은 총 12시간. 이제 마지막 일탈을 얹을 시간이다. 산 미구엘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필리핀 직원은 냉장고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산 미구엘을 꺼내 테이블 앞에 놓으면서, 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 괜찮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통금시간을 두 시간 넘긴 밤 12시, 굳게 닫혀있는 학원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철문 틈새로 가드의 차가운 눈초리가 보였다. 그는 내 ID 카드를 확인하고는 이름과 방 번호를 규칙 위반자 목록에 적었다. 증거를 남기려는 듯 12시를 가리키는 시계 앞에 나를 세우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학원은 모든 불이 꺼진 채로 고요했다. 금지된 시간, 금지된 구역을 유유히 가로질러 방으로 가면서 이제야 숨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탈이 완성되었다.




   다음 날은 Rose 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이틀이나 수업에 빠진 것에 대한 변명을 해야 했다. ‘일탈이 필요했거든.’ 을 구글 번역기로 돌려봤다.

   ‘I needed a break.'

   늘 그랬듯 번역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break 는 그저 휴식 아닌가, 이런 밋밋한 표현 밖에 없나, 이걸로는 말맛이 전혀 안 살지 않나. 답답함이 다시금 밀려왔지만 그래도 어제만큼의 세기는 아니다. 밋밋한 표현에 일탈의 향을 가미한다.

   “I wanted to break the law for healing.”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던 Rose 는 내가 하려던 말을 이해했는지 웃는다. 일탈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이제 속죄를 위한 3주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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