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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Aug 30. 2024

Don't cry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난 눈물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울컥한다거나 사연이 있는 모든 이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건 아니었고, 마치 보름달이 떠야 비로소 늑대로 변하는 늑대인간처럼 내게도 눈물샘이 솟아나는 특정한 시기가 있는 듯했다. 한창 ‘눈물의 여왕’을 볼 때가 그랬다. 아무리 백현우와 홍해인의 사랑이 애절하더라도,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던가. 백현우가 울면 내 가슴도 저리고 홍해인이 울면 내 마음도 아리고 둘이 함께 울면 어김없이 내 빰을 따라 눈물이 주룩 흘렀다.


   아내를 한국에 두고 혼자 필리핀에 와서였는지, 어린 친구들과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고되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구멍 숭숭 뚫린 내 영여실력의 틈새로 새어버린, 미처 뱉어지지 못한 감정이 12주 동안 켜켜이 쌓여서일 수도 있다. ‘눈물의 여왕’ 이 아니더라도 감정이 요동치는 일은 잦았다. 오늘도 고생했어, 라는 아내의 카톡에도 울컥하고,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가겠네, 하는 강사의 말에도 북받쳤다.


  언젠가 Rose에게 한국에서는 생일을 ‘축하’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생일은 그저 영어 표현처럼 ‘Happy'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 축하는 합격이나, 승진이나, 결혼이나, 출산 같은 일에 더 어울리지 않나, 별다른 노력이 없어도 1년을 보내기만 하면 다시 돌아오는 생일을 굳이 축하까지 해야 하나,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Rose 는 그런 나에게 1년 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썼다는 시를 꺼내 보여주었다.


   ’Tomorrow is not promised to any one‘ 이라는 제목의 시는 슬픔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묘사하는 걸로 시작됐다. 그러다 시간을 다시 되돌려 한번 더 기회를 얻는다면 더 꽉 안아주고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거라면서, 내일은 누구에게도 약속되지 않았으니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오늘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내용이었다. Rose 는 1년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진심으로 축하할 일인 거라고, 생일은 그런 거라고 말했다.


   그날 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더 꽉 안아주지 못했음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Should've hugged you tighter
Stayed with you a little longer

   내일은 누구에게도 약속되지 않았다는 말이 무서웠다. 괜히 눈물이 났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학생의 하루가 힘든 것처럼 강사의 하루도 힘들었다. 학생이 종종 수업을 거부하며 딴짓만 하는 것처럼 강사도 때로는 수업은 팽개치고 잡담만 했다. 학생이 이따금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수업에 빠지는 것처럼 강사도 때때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휴강을 했다. 불성실함에 있어서 강사는 학생과는 달리 바로 질타의 대상이 됐다. 수업 도중에 뜬금없이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더라, 녹음기를 틀어 놓고 30분 동안 영어 듣기만 시키더라, 수업시간 내내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하품만 하더라, 하며 학생들은 강사의 불성실함을 불평했다.


   그런 면에서 Rose 는 철저하고 완벽했다. 하루의 마지막, 11교시 수업이라 자신도 분명 힘들었을 텐데 Rose 는 늘 꼿꼿한 자세로 내 눈을 응시했다. 매일 미리 준비해 온 질문을 나에게 던졌고, 나의 답변을 듣고, 고치고, 다듬었다. 12주 내내 시간을 꽉 채운 수업을 이어나갔고, 12주 동안 단 한 번도 휴강을 하지 않았다. 그런 Rose 가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누구보다 단단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Rose 에게 배운 건 단지 영어만이 아니었다.


   12주 일정의 마지막 날, 11교시 마지막 수업, 강의실의 좁은 책상 위에 미리 준비한 선물들을 올려놓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곳에서의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도 너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먼저 일거야.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지났을 때 문득 필리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 기억은 분명 또 한 번 날 웃게 할 거야. 그건 너에 대한 기억일 테니까.”

   내가 이렇게나 영어를 잘했던가. 상황이 닥치니 말이 술술 나오는구나.


   Rose 는 뜬금없이 유창한 내 영어 실력에 놀라서인지, 아니면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들 때문인지, 마지막 수업이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넌 내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 최고였어, 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부쩍 늘은 너의 영어 실력을 보니 뿌듯해, 라든가 나도 너와 보냈던 3개월이 즐거웠어, 라든가 나 역시도 너를 오랫동안 기억할게, 같은 말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Rose 의 입에서는 내 기대와는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Don't c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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