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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Sep 13. 2024

마흔아홉은 그렇지 않나

   9월,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는 진작에 지났고, 이제 다음 주면 가을의 한복판인 추석인데 한낮의 햇볕은 여전히 뜨겁다. 지긋지긋한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월에서 5월까지 필리핀에서 한 차례 여름을 살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여름을 보냈다. 여름만 7개월 가까이 보내고 있는 셈이다. 같은 계절 속에 멈춰 있어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예전의 게으른 일상으로 되돌리는데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지긋지긋한 영어, 당분간 쳐다도 안보리라 다짐했지만 3개월간 찌든 영어의 때를 벗기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신작 미드를 보면 정성껏 번역된 한글자막을 외면하고 쓸데없이 자꾸만 배우가 말하는 영어 대사를 직접 들으려는 무모한 짓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고, 앞으로 꼭 한번 가보자던 미국 여행이야기를 하다 캘리포니아를 말할 때 나도 모르게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 'F' 발음을 만드는 재수 없는 짓을 하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어느덧 필리핀에서 보낸 12주 보다도 더 긴 시간을 한국에서 흘려보내고 있는 지금은 다행히 회복이 되었다. 하루 1시간, 영어 공부로 채운 시간표는 이제 힘 하나 들이지 않고도 쉽게 무시해 버린다. 죄책감 따위도 역시나 들지 않는다. 영어에 무심하던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왔다.




   아내는 다음번 여행에 대한 기대가 크다. 전보다 유창해졌을 나의 영어실력을 믿어서이다. 예상 못한 다급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어학연수를 다녀온 유학파 남편의 유창한 영어가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단다. 들뜬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마도 여전히 걱정해야 할 거다. 툭치면 탁하고 나오는 수준의 영어실력이 아니니까. 탁하고 나오더라도 한 시간쯤 지나 오류를 깨달으며, 아, 아까 잘못 말했다, 이렇게 말했어야 했네, 할 것이 뻔하다. 어설프게 아는 건 모르는 것보다 못할 때도 많다.


   나는 아마도 전과 변함없이 여행지에서 만나는 외국인들과의 대화를 피할 것이고, 영어가 안 통해 답답한 상황을 접하더라도 참을만하다 싶으면 그냥 참을 것이다. 정 못 참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구글번역기를 꺼내면 되니 영어 때문에 아쉬울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행 내내 옆에 있는 아내와 한국말로 웃고 떠들어 대면서 외국이지만 한국에서처럼 여행을 즐길 것이다. 어학연수를 다녀오긴 했어도 아마도 이전의 여행과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12주의 시간이 무의미했다는 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반추해 보니 한국을 떠날 때 품었던 기대와 조금 어긋났을 뿐 필리핀에서 보낸 12주는 무척 괜찮은 ‘여행’이었다. 와이파이와 에어컨이 있는 쾌적한 1인실 방에 끼니때마다 뷔페식 식사를 대접받고, 지내는데 심심하지 않도록 하루 여덟 번의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고, 내가 무어라 말하든 귀 기울여 들어주는 영어 꽤나 잘하는 현지인이 그 이벤트를 함께 해주는, 이런 것들이 하루 10만 원 정도의 비용만으로 제공되는 여행상품이라 생각하면 꽤나 괜찮지 않나.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하게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는 올인클루시브 리조트라 생각하면 정말 혹하지 않나.


   어쩌면 마흔아홉에 다녀온 어학연수였기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는 많이 늘었어? 라는 물음에, 나이 들어서 하려니 생각보다 안 늘더라, 하고 웃어넘겨도 되는 나이.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고, 매일매일에 나를 갈아 넣지 않고, 그래서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단지 어학연수를 다녀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주변에서 말해주는 나이. 마흔아홉은 그렇지 않나.


   어쩌면 몇 년 후, 혹독한 한국의 겨울을 피해 영어가 옵션으로 제공되는 필리핀의 올인클루시브 리조트로 또 한 번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 어학연수라니 참 대단해! 라는 말을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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