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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를일별진 Sep 05. 2020

넷플릭스가 쏘아올린 3%의 공

드라마 <3%> 리뷰



처음엔 흔히 말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종말 직전의 세상. 우성과 열성을 가르는, 단 3% 만의 이상향이 존재하는 세상. 3%에 속하지 못한 이들의 투쟁 혹은 그들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      


시즌을 거듭하고,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마지막을 보고 난 후 느끼는 바는 처음과 완전히 달랐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계산된 철학 영화였구나. 진심으로 감탄하고 또 감동받았다.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 태어난 한 줄기의 빛. 절망뿐이라 믿었던 세상의 한 가닥 기쁨. 그러나 그 희망이 인간의 오만함을 입을 때, 희망은 불합리함이 된다.


모두는 그 불합리함을 개선하고자 노력한다. 한마음으로 일어서기도 하고 폭력이 일어나기도 하며 대다수는 분열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불합리함이 사라진 세상은 혼돈 그 자체가 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다. (드라마의 끝은 권선징악이 명확한 해피엔딩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희망이란 건 때로 단체를 결속하는 수단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일 수도 있고 눈에 명확히 보는 돈일 수도 있다. 우습게도 그러한 희망은 세상이 비극일수록 더욱더 극적인 형태를 보인다.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 나보다 나은 자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산다는 건 애초에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 옳든 그르든 살면서 내가 신념을 갖고, 제대로 움직였던 적이 있던가. 처절하게 패배하고 절망했다가 다시금 희망으로 일어선 적이 있었던가. 인생의 불합리함을 따지며 매일을 비교의 절망 속에서 보낼 것인가.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리며, 그저 이 순간을 즐길 것인가.


철이 없어 보일 수도, 세상을 몰라서 그렇다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꼭 세상을 알아야 하느냐. 어차피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이 모든 세상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언제 어디에 있든 우리 인생 속, 우물 안 개구리다. 난 그냥 우물 안 개구리로 살련다. 내 우물 속에서 내 가족들과 함께. 그저 함께 있음을 기뻐하며, 그냥 그렇게 살련다.     

그래. 희망은 내 마음속에 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결정되는 희극과 비극은 포장일 뿐이다. 외부적인 요인은 진짜 내면을 건드릴 수 없다.



참 좋은 드라마를 봤다.

무려 4시즌에 걸쳐 비유와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서 드라마는 말했다. 진짜 소중한 건 가까이 있었다고. 우리를 망치는 건 오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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