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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를일별진 Jan 06. 2021

깨진 유리컵

일이 터지고 나서야


유리컵이 깨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안일한 생각으로 걸쳐놓은 그릇이 떨어지면서, 아래에 있던 컵이 완전히 깨졌다. 아끼던 컵이었는데. 예전 같았으면 왜 그릇을 거기다 뒀을까 후회하며 깨진 컵을 아까워했을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아, 깨졌네. 깔끔하게 깨져서 다행이다. 딱 이 정도.


깨진 컵을 처분해야 했다. 누군가 다치지 않게 꼼꼼히 컵을 챙겨놔야 했는데,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나중에 치울 요량으로) 가득 찬 쓰레기봉투 위에 올려뒀다.

얼마 뒤, 쓰레기를 버리려다 내가 올려놓은 유리컵에 손가락이 베였다. 제법 깊이 베였음에도, 동요는 없었다. 아, 생각보다 아프구먼. 피난다. 딱 이 정도.


피나는 부분에 대충 밴드를 붙이고, 유리컵을 꺼내 들었다. 버리는 건 둘째치고 같은 실수를 해선 안 되니, 집에 있던 뽁뽁이로 컵을 감쌌다. 컵을 야무지게 싸놓고 나서야 생각에 잠겼다.     


미루고 미루던 게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구나.

관계든 일이든 무슨 상황이든 조금이라도 찝찝함이 있다면 그냥 넘겨선 안 될 일이다. 내가 컵을 버리면서 베이면 어쩌지… 생각했던 게 현실이 된 것처럼, 무심코 넘겼던 일의 화살은 어디로든 향하게 마련이다. 베인 상처야 아물면 그뿐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실체가 없다.


매사 일이 터지기 전에 조심해야 하는데 꼭 이렇게 뭔가 터지고 나서야 개선의 의지를 다지는 상황이, 썩 달갑진 않다. 문제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그간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거니까.

깨진 유리컵의 위험성을, 내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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