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 방송 작가는 방송 잡가

눈칫밥을 내 것처럼 맛있고 건강하게

by 흐를일별진



방송 작가 지망생들이 흔히 말하길 일을 시작하기 전 제일 걱정되는 건 '글 솜씨(일명 글빨)'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작가는 단어 그대로 글을 쓰는 직업이 맞으니까.

그러나 방송 작가에게 진짜 중요한 건 글빨보다는 센스와 눈치,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다. 여기서 그림이란 회의 중에 나오는 것들을 시뮬레이션해서 가능 여부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글빨은 최소 1년 차 이상이 됐을 때 미리 보기나 흘림 자막, 보도자료 같은 것에서 부각되기는 하는데, 여기서 적용되는 글빨은 최소한 책만 많이 읽어도 어느 정도 커버 가능하다. (책 안 읽는 막내는 대번 티가 난다)

그러니 진짜 중요한 건 센스다. 수시로 팀이 바뀌는 프리랜서 작가의 생존에 직결되는 능력은 센스다.




막내였던 나의 주된 업무는 비서 역할이었다.

회의 전 회의실에 불을 켜 두고 자료를 세팅하는 것부터 회의록을 정리하는 것. 수시로 바뀌는 스케줄도 매번 정확하게 매니지먼트에 전달하는 것. (모든 전달은 문자나 톡으로 증거를 남겨야 뒤탈이 없다)

언니들의 수월한 대본 작성을 위해 꼼꼼하게 자료 조사를 하는 것. 여기서 센스를 발휘한다면 시킨 것 외에도 필요할 것 같은 내용을 추가로 찾아 정리해두는 게 포함됐다. (단 월권이 아닌 선에서)

언니들이 쓴 대본이나 큐시트를 다시 읽으며 오타를 찾아 수정하는 것. 제일 중요한 게 이 더블체크의 역할인데, 왜냐. 문제가 터지면 오타를 낸 언니의 잘못이 아니라 그걸 발견하지 못한 막내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보통 평범한 오타가 많긴 하지만 어떤 언니들은 본인의 맞춤법 실력을 검열하지 않고 어차피 막내가 본다는 생각으로 오타 밭을 건네주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 모든 업무들의 공통점을 말해보자면 언니들의 실수를 커버하고 그녀들의 행동을 살피며 완벽히 서포트하는 게 막내의 역할이다. 무언가를 쓰느라 엉덩이가 무거운 건 퇴근 후 집에서 하면 되는 행동이고 실제 사무실과 현장에서 요구되는 건 깃털처럼 가벼운 엉덩이와 눈치다.


내가 언니들에게 가장 크게 칭찬을 받았던 순간도 그러했다.

언니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걸 내가 갖고 있지 않을 때 화를 냈다. 특히 촬영장에선 더했다. 그 정도의 센스도 없냐며 개인적인 걸 촬영에 필요한 것처럼 둔갑시켰었다. 몇 번 욕을 먹고 나니 오기가 생겨서 한동안은 백팩 속에 모든 걸 넣어 다녔다. 지퍼백에 언니들 이름을 써서 각자 필요한 걸 나눠 담는 방식으로. (그쯤 되면 언니들의 행동에도 패턴이 생겨서 어지간하면 말하기도 전에 필요한 걸 눈치챌 수 있다) 그러다 한 번은 언니 한 명이 머리칼을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길래 냉큼 달려가 머리끈을 내밀었던 적이 있었다. (머리끈 종류도 언니들마다 선호도가 달랐음) 그때 받은 칭찬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엄청났다.

물론 미리 보기, 흘림 자막, 보도자료 같은 것을 최소한의 수정으로 넘길 수 있게 됐을 때 칭찬을 받긴 했지만 정작 글로 받은 칭찬은 딱 그 순간 뿐이었다.

결국 방송 작가 생활을 쭉 편안하게 하려면 글을 잘 쓰기보다는 팀 언니들에게 잘 보이는 게 중요했다. 모든 문제의 정답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니 스타일에 따른 정답이 수십 개 존재했다. 그리고 그걸 모두 꿰고 있어야 하는 게 이 바닥의 룰이자 후배 작가의 덕목이었다.


다만 이러한 막내의 특징은 교양 팀 막내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교양은 개인의 롤(코너, 꼭지)이 중요하고 대체로 팀 안에서도 업무가 각자의 성과 중심으로 나눠져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예능은 팀 전체가 하나로 뭉쳐져야 하며 특별한 코너 없이 통 영상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향은 크게 도움되지 않는다. 즉 나 이거 다 했으니 가겠다는 말이 통하지 않으며, 내가 찾았으니 내 자료! 내 성과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거다.




잠깐 여기서 예능과 교양을 짚고 넘어가자면, 위와 같은 차이 때문에 예능을 전담으로 오래 한 언니들은 교양 출신 후배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더라. (실제로 그 다른 성향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재밌는 건 교양을 오래 한 작가는 자신을 방송/구성 작가라 칭하는데 예능을 오래 한 언니들은 자신을 예능작가라 칭한다. 그만큼 예능은 교양과 구분되길 원한다. (물론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고로 현 작가 지망생들은 자신이 꿈꾸는 작가 생활이 정보를 주는 교양인지 웃음을 추구하는 예능인지 (혹은 다큐인지) 명확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 "교양 프로그램을 하다가 예능으로 넘어가면 돼"라고도 말하는데 실질직으로 그게 별문제 없이 용인되는 시기도 딱 1년이다. 애매한 3~4년 차 작가가 교양에서 예능으로 옮겨가게 되면 "역시 교양하는 애들은 안돼"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만큼 일의 습관은 무섭고 예능판의 작가들은 그 이상으로 무섭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작가는 잡가다.

고고하게 앉아서 글을 쓰고 구성을 하는 직업이 아니다. 글을 쓴다기보다 촬영이 가능하게끔 전체 틀을 그려야 하며 그 그림을 모두가 확인 가능하게끔 풀 수 있어야 한다. 매니지먼트를 관리해야 하며 변덕스러운 출연자들을 넉살 좋게 컨트롤해야 한다. 구성안만 쓰고 땡이 아닌, 촬영에서의 변수를 컨트롤하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출근하자마자 그날의 연예 이슈를 줄줄 읊을 정도로 온갖 소식에 능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을 원칙대로 하는 정석 FM 스타일은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아마 그런 이들은 그놈의 여자 짓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함을 버텨내기도 힘들 거다.


예능 작가들 사이에서의 최고 칭찬은 또라이다.

우습게도 나는 또라이가 되어 살아 남았다. 물론 그만큼 욕도 먹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또라이였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기껏 방송작가에 대한 글을 쓰면서 "또라이가 돼"라고 말하는 게 우습긴 한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현실이니까.

아마 무엇을 어떻게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그대들의 자존감이 깎여 나갈 거다.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려면 맨 정신이 아닌 또라이가 되는 수 밖에 없다. 미친듯이 독해지거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