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쌓일 수록 방송작가가 독해지는 이유
나를 독해지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이 업계에서 겪은 다양한 방법의 괴롭힘과 소문이다. 한동안 직장 내 언어폭력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작가 업계가 그 상황에서 자유로운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물론 인맥 기반의 취업에 자칫 잘못하면 소문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내부 고발을 할 이유는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작가 vs 작가뿐 아니라 어린 연차를 향한 피디들의 언어폭력 및 성추행도 비일비재)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걱정도 다 부질없는 거였다.
내가 직접 보고, 겪었던 일들(혼난 이유가 명확했던 것 외에 도무지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경우의 괴롭힘만)을 먼저 풀어보자면 이러하다.
(1)
절대 소리 내 혼내지 않고 메신저로만 혼을 냈다.
왜냐. 언니들에게 티를 내면 안되니까. 그러나 내 어깨가 움츠러들고 점점 표정이 굳으면 그때부터는 더 심한 폭언이 이어졌다. 본인을 욕 먹이려 작정한 거냐며 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는 둥...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그 폭언을, 나는 무표정으로 혹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으며 견뎌내야만 했다.
(2)
이유 없이 무작정 '다시 쓰기'를 강요했다.
막내 작가의 업무 중 미리 보기라는 게 있다. 매 회차 공개 전 그 회차의 재미 요소를 정리해 홍보문을 작성하는 거였는데,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그 미리보기를 수십번 고쳐 썼다. 주말이라 아무도 없는 회사에 홀로 앉아 울었다. 엉엉 울면서 "제발 고칠 점을 알려달라, 그럼 제대로 수정해서 언니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다"고 하소연했으나, 나는 해가 질 때까지 미리 보기를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했다.
(3)
자신의 개인 약속을 위해 나를 이용했다.
선배 언니들이 그 언니와 함께 밥을 먹고 오라고 시킨 날이면, 여지없이 그녀는 약속을 잡고 혼자 떠났다. 그리고는 나에게 꼭 메뉴 두 개씩을 시켜 본인과 먹은 거처럼 연출하라며 지시했다. 나는 여의도 식당에 혼자 앉아 보기에도 많은 2인분을 시켜놓고 그 괴롭힘의 이유를 찾으려 울음을 삼켰다. (알고 보니 그녀는 선배들 몰래 투잡 중이었고 이후 다른 걸 핑계로 일을 그만뒀는데, 그녀가 그만둘 무렵 내 몸무게는 7kg이 빠져 있었다)
(4)
한 언니가 나를 앉혀놓고 막내 작가의 덕목이라며 십계명을 정리해 주었다. 그 내용의 반은 <사생활을 포기할 것> <연애는 도움이 안 되니 일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 <주말을 반납할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걸 프린트해 책상에 붙여두고 매일 매일 읽게 했다.
(5)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녔다.
어쩌다 보니 회사 부장님 급의 임원들이 나를 챙겨주게 된 상황이 생겼는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꼬리를 친 적도, 뭔가를 흘린 적도 없다.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메인 언니는 누구를 만나도 "우리 막내는 부장급이 좋아해. 뭘 어떻게 하는 건지."라고 말하며 내 이미지를 묘하게 깎아내렸다.
(6)
복사기를 고치지 못한다고 혼이 났다.
(7)
선배보다 먼저 잠자리에 든다며 혼이 났다.
한겨울의 야외 촬영 날. 밖에서 바쁘게 움직이다 숙소에 들어오니 몸에 열이 올랐다. 마침 언니들과의 회의도 끝난 터라 먼저 자도 되냐 묻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우리 팀 막내는 몸 관리도 안 하고 언니들보다 먼저 자네!" 하하호호!
이후 긴 시간 동안 나는 일부러 몸 관리를 안 하고 선배보다 먼저 자는 무개념 작가가 되어 있었다. 반복되는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 폭력이었지만 그녀들 중 누구도 그게 폭력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8)
후배들을 접대의 도구로 활용했다.
라디오로 분야를 옮겼을 때, 라디오국 임원분들과의 회식이 있었는데 그때의 메인 언니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 자신은 약속이 있다며 그 중요한 자리에 후배들만 보냈고, 막내를 지키기 위해 내가 부장님의 옆에 앉아 술을 따랐다. 다행히 별다른 일 없는 무난한 회식 자리로 끝났지만, 그때 언니의 태도는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있다. 우리를 보낸 직접적인 이유는 '임원들이 어린 애들을 좋아한다는 거'였으니까.
(9)
피디와 친분있는 작가는 묘한 괴롭힘을 받았다.
작가의 취업은 주로 작가로 인해 이루어지는데, 간혹 피디님의 선택을 받아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은 내가 뒤늦게 (선배 언니의 부름으로)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됐다. 거기엔 참 예쁜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어쩐지 회사 분위기가 묘했다. 예쁜 언니 포함 대본을 써야하는 언니들끼리는 늘 날선 대화가 오갔고 부득이한 경우 외엔 서로가 있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뭔가 이상해서 상황을 파악해보니 예쁜 언니는 피디의 픽으로 들어온 작가였다. 한 번 밉보이니 그 언니가 하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얼마 뒤 나는 메인 언니가 지인 작가에게 예쁜 언니를 욕하며 "피디가 데려왔는데 일을 안 하려 한다. 완전 여우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걸 직접 봤다. (사실 그 예쁜 언니는 후배에게 인기가 많았다. 본인 할 일을 절대 미루지 않았으니까)
그 와중에 적극적으로 후배를 괴롭히던 딴 언니 하나는 자신이 써야 하는 구성안을 후배에게 마음껏! 떠넘겼다. 그리고 피디 픽을 받은 언니와 나를 떨어뜨리려 이간질을 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편가르기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이간질 언니의 폭언과 괴롭힘 때문에 막내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10)
예민한 선배는 후배의 기를 빨아먹는다.
예민하기로 소문난 선배가 있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싸웠다더라 하는 썰이 전설처럼 도는 언니였다. 사실 난 그 언니와 크게 부딪히진 않았는데 내 위의 선배가 그 언니의 지독한 예민함 때문에 힘들어했다. 쇼양 특성상 중년 어머님들을 사로잡는 아이템이 생명인 프로그램이었는데, 메인 언니는 어떤 아이템을 들이밀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깠다. 대안은 알려주지 않으면서 더 찾아오란 말만 반복했다. 결국 예민한 언니의 기분을 잘 파악해야 아이템이 통과될 수 있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니 늘 씩씩하게 잘 웃고 일도 잘 하던 선배가 울었다. 몸이 상했고 살도 빠졌다. 심지어 그 무렵의 출퇴근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새벽 4시였기에 사람의 멘탈을 부수기엔 완벽한 상황이었다.
(11)
자신이 메인인 줄 알던 세컨 작가는 월권을 행사하며 후배를 잡았다.
메인 언니를 보고 들어갔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컨 언니었다. 그 언니는 메인 언니와 친분이 있던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예민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점점 괴롭힘이 구체화 됐다. 지금 기억나는 건 일본에서의 촬영을 준비하면서 일정표를 만드는데 표에 색깔을 넣지 않아서 혼이 났다. 그 와중에 그녀의 마음에 드는 색깔을 찾아 몇 번이나 고치고 또 고치며, 그냥 내 존재가 잘못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12)
능력이 없는 선배는 무작정 수정을 요구한다.
간혹 기획안을 쓰거나 페이퍼를 만들 때, 어떤 선배들은 무작정 '추상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을 요구한다. 앞서 말한 (2)의 수정이 괴롭힘이었다면 지금의 수정은 본인 조차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 상황이 선배의 능력이 없기 때문임은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에는 내 부족함을 탓하기 바빴지만)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에서 선배 언니가 제대로 감을 못 잡고 있을 경우, 그 언니가 해답을 찾을 때까지 후배는 무작정 수정을 반복하며 언니 입맛에 맞는 무언가를 제공해야 하는 거다.
(13)
캐릭터가 강한 작가들은 질투의 대상이 된다.
내 캐릭터를 객관적으로 말해보자면 사투리를 쓴다는 거, 말을 하면 눈에 띈다는 거, 후배들과 친하다는 것과 피디들과도 쉽게 친해진다는 거다. 그간 내가 생각했던 작가의 덕목이 넉살과 친화력인데... 그게 문제가 돼도 한참 문제가 됐다.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할 때 내 바로 위의 선배 언니에게 묘한 괴롭힘을 당했다. 메인급 선배 언니들 앞에서는 "얘가 언니들을 싫어하는 거 같다. 불편해하는 게 보인다. 쟤는 자기가 좋아하는 후배들이랑 있게 하자" 후배들 앞에서는 "쟤를 믿지 말라"는 둥 별말을 다했더라. 그렇게 내가 선배 언니들의 곁에도 못 가게끔 길을 막고 늘 옆자리를 본인이 차지했다. 회식할 때 내가 출연자 가까이에 앉을 상황이라도 되면 무조건 본인이 주요 자리를 차지하는 건 기본이었다. (도대체 왜 나를 견제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예쁜 후배가 들어왔을 때, 언니들은 그 후배가 점점 못생겨진다는 둥, 예쁘기만 하지 일은 영 못한다며 외모를 화두로 올려 까기 바빴다. 그 무렵 후배 포지션의 작가들끼리 그런 말을 했다. 예쁘고 통통 튀는 후배들을 한 번씩 까고 난 후 마지막으로 중간에 있는 내가 공격 대상이 된 거라고.
한 번은 그 언니가 촬영 소품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현장에서는 모든 잘못이 후배에게 돌아가 욕을 먹고 욕 먹은 후배는 눈물까지 쏟을 뻔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품을 마지막으로 챙긴 사람이 그 언니였다. 이걸 어떻게 알게 됐느냐. 그녀가 소품을 챙기는 모습이 CCTV에 찍혀있었고 우리는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을 위해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소품이 배차 의자 밑에 떨어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솔직히... 그 언니의 잘못을 알렸을 거다)
(14)
주변을 활용해 상황을 환기하는 언니는 농담이 폭력임을 모른다.
제법 긴 시간 알아 왔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내 사투리가 없어 보이고 촌스럽다고 말했다. 어떨 땐 매력이라고 했다가 어떨 땐 촌스럽다고 하며, 잊을만하면 나를 깎아내렸다. 자신은 도도한 작가진을 꿈꾼다며 그러지 못한 나를 다른 후배와 비교하기도 했다. 출근하는 후배들의 의상과 화장을 두고 비꼬았고, 한 번은 홈쇼핑에서 구매해 엄마와 하나씩 나눠 들었던 내 가방을 보며 "짝퉁 갖고 다니면 연예인들이 무시해. 그냥 종이가방을 들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짝퉁인지 몰랐다. 애초에 아는 명품이라곤 구찌, 루이비통, 프라다 정도였으니까) 입술 색이 진하면 아줌마 같다고 하는 등 모든 외형적인 것들이 그 언니에겐 농담의 요소로 활용됐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던 모든 후배들에게도 그랬다.
그 언니가 자랑하는 건 (본인만 아는) 다른 프로그램의 예쁜 후배 작가들이었는데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녀들과 비교당했다.
살이 쪘다가 다이어트 후 예뻐진 후배의 전후 사진을 갖고 다니며 다른 후배에게 보여주고, 내 사진도 갖고 다니며 농담삼아 언급했다고 했다. (그 언니는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모르지만, 나는 충격을 받아 그 언니와 연락을 끊었다)
(15)
피디와 친분이 있어서 괴롭힘을 받았다.
한때 드라마에도 관심이 있었던 나는, 피디님들의 부름에 그분들이 있던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그 팀의 모든 피디를 알고 있었다) 물론 메인 언니와 추가 면접도 보고 나서 결정된 거였다. 피디 픽 작가에게 닥치는 위험을 알았기에 정말 조심했다. 작가 언니가 있을 때는 굳이 피디와의 친분을 드러내지 않았고 온전히 작가의 입장에서 해야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언니에게서 묘한 견제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기분탓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확신으로 다가왔다.
내가 쓴 대본이 무작정 난도질당하고 녹화 현장에서 프롬프트 올리는 속도가 빠르네 느리네 욕을 먹으며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로 혼났다. 가끔 피디님들이 내 대본을 칭찬하기라도 하면, 언니는 나서서 내 대본의 문제점을 역으로 지적했다. 발전하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일주일에 3일만 자면서 일했고 피곤한 걸 티내기 싫어서 더욱더 나를 채찍질했다.
후에 들어보니 내가 일을 하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부터 언니는 나를 스파이 취급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부러 내가 쓸 대본만 어렵고 복잡하고, 자칫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연만 골라서 줬던 거였다. (웃긴 건 내가 쓴 대본의 시청률이 제일 잘 나왔다)
그렇게 일을 가지고 괴롭힘이 지속되니 공황이 왔다. 출근하는 길 버스 안에서 이대로 뛰어내릴까. 그럼 좀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회사에 도착하면 숨이 막혔다. 언니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식은 땀이 났고 언니가 앉은 자리로는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보기먼해도 미친듯이 화가나고 증오가 차올라서. 어느 날인가 의자 위로 솟은 못 조각 하나를 보며 '언니가 저기에 찔려서 파상풍이 오거나 끝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와 마주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두는 와중에도 언니는 내게 폭언을 쏟아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단다. 그럼 나를 왜 뽑았을까. 폭언을 하면서도 당장의 업무가 걱정됐는지 돌려 돌려 나를 잡았지만, 더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만두고 얼마 뒤, 그 언니는 회사의 중견급과 트러블이 생겨 메인 자리를 내려놨다)
직접 겪진 않았지만,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들과 떠도는 소문 몇 개를 풀어보자면 이러하다.
식사 시간 중 막내에게 손을 들고 서 있으라며, 공공연하게 왕따를 주도했던 언니가 있다고 들었다. 자기 일을 후배에게 넘기고 그 일이 잘됐을 때는 본인이 한 것 처럼, 욕을 먹었을 땐 후배의 역량을 탓하며 성과를 스틸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밥을 먹으면 "많이 먹는다"고 욕하고 밥을 조금만 적게먹으면 "꼴에 다이어트를 한다" "특별한 척한다"며 폭언을 쏟아냈다고 한다. 후배들이 출근하는 길에 스타벅스 커피를 사서 왔더니 "돈도 없는 것들이 사치 부린다"며 폭언. 결국 카드도 주지 않고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고 한다. 너희들이 먹는 스타벅스 커피로.
중요한 건 이 모든 소문에 일적인 것과 업무를 가르치면서 일어나는 '객관적'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연예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업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기싸움이 많이 벌어지는데 어떤 경우는 출연자와 사담 한마디라도 섞으면 그 후배를 쥐잡듯이 잡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본인이 여왕벌이 되길 바라는 경우가 그러하다. 기억 나는 것들만 서술한 게 이 정돈데, 어떤 것들은 선배 언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하다. 오래 버티려면 힘든 건 지우고, 선배들이란 존재 자체도 내게서 지워버리는 게 속 편하다.
지금껏 작가를 하면서 느낀 건 하나다.
후배를 책임지고 지켜주는 선배가 없다는 것. 가정이 있거나,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사람이 약해지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일과 사생활은 분리되어야 하고, 필요할 때 싸워주고 꼭 해야하는 말은 하는 게 메인의 덕목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단 한 명도 그 모든 걸 책임감 있게 해 주는 메인을 보지 못했다. 우물 안 개구리의 말일 수도 있으나, 정말 유명한 프로그램을 많이 한 작가님조차도 본인이 데리고 있는 후배들이 또 다른 후배를 쥐잡듯이 잡는 걸 모른 척 하더라.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때에 따라 무책임을 뜻한다.
그나마 좋은 메인은 데리고 있는 세컨과 서드가 괴롭힘을 담당하기도 하고 어떤 메인은 절친한 세컨과 한 팀이 되어 업무를 나 몰라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괴롭힘과 불합리함은 고스란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서 작가들이 하는 가장 많은 불평이 "나 혼자만 일한다"는 거다. 실제로 선배들이 일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버텨 메인 작가가 되면 이 바닥이 꿀 직업이라고 하는 데, 그건 연차가 높아질수록 하는 일이 '진짜' 줄어들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진짜' 일을 안 한다는 소리다.
연차만큼 쌓아온 인맥을 활용해 프로그램의 기획/편성을 따내는 게 메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만, 자신의 팀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다면 (썩어가는 팀을 방치한다면) 그걸 옳다고 볼 수 있는 걸까. "나는 아이디어가 없으니 젊은 피인 너희들이 아이디어를 좀 내봐"라고 말하는 메인을 능력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이쯤 되면 내가 운이 없거나 선배 복이 없다고 할 수도 있는 데, 주변 많은 작가들이 한결같이 선배의 괴롭힘과 업무의 불합리를 토로하는 걸 보면 이건 긴 시간 이어져온 고질적 문제이지 싶다.
그나마 저런 상황들을 겪으며 얻은 것 하나는, 시작은 괴롭힘이었을 지라도 그녀들의 입맛을 맞추는 방법을 배웠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욕먹지 않는 페이퍼의 폼을 익혔고 되면 안 되는 선배의 표본도 직접 경험해서 알 수 있었다. 굳이 하나 더 따져보자면 좋은 작가가 무엇인지 일 잘하는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를 최악의 사례를 통해 배웠다. 지금도 후배들은 나에게 연락해 자신들이 겪은 불합리함을 토로하는데 어찌된 것이 점점 교묘해지고 강도도 업그레이드 된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여기는 변화가 없구나.
TV에 진절머리가 났다. 누군가가 죽지 않는 한, 작가 업계엔 은퇴가 없기 때문에 물갈이가 쉽지 않다. 이 바닥에서 계속 TV를 하려면 그 싫은 언니들에게 적당히 허리를 굽혀 가면서 아부를 해야 하는 데, 더는 그 짓을 못 하겠더라. 융통성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더는 그렇게 나를 속이며 살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잠시 몸을 담았던, 티비가 아닌 라디오는 괜찮느냐? 그것도 아니다.
TV보다 더 폐쇄적인 라디오에도 별의별 일이 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