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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애 버라이어티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

막내 작가들이 연애를 못 하는 이유

by 흐를일별진



후배 작가의 연애는 중요한 가십거리다.

어떤 언니들은 (앞선 글에 썼듯) 십계명을 통해 연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어떤 언니들은 작가의 연애는 결혼 아니면 빠른 이별뿐이라며, 할 수 있을 때 혼인 신고를 하거나 아예 붙잡아 버리라는 둥 별의 별소리를 해댔다. 이 바닥 사람이 아니면 절대 작가를 이해할 수 없고 너도 곧 헤어질 거라며 확신하는 언니도 있었다. 처음엔 언니들이 왜 자꾸 잘 만나고 있는 애들한테 이별 이야기를 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얼마 뒤 내가 헤어짐을 겪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작가 생활 2년 차까지 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대학 cc로 만난 친구였고 첫 남자친구였기 때문에 그는 내 모든 것의 기준이었다. 그는 작가의 꿈을 이룬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제작진 이름에 올라있는 나를 보며 기뻐했고 늘 칭찬했다. 나는 그가 내 일을 존중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가 작가의 업무 방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났다. 퇴근 후 주말 데이트를 하던 중, 선배 언니의 갑작스러운 연락에 우리의 약속은 급히 마무리됐다. 모처럼 시간을 내 영화를 보는 중에도 끊임없이 전화가 왔다. 한 번씩 전화를 꺼두면 다음 날 심하게 혼이 났기 때문에 전화를 끄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막내 작가에게 퇴근 후 사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재택 작업이 많은 작가의 특성상 언니들은 퇴근 후 밤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녀들을 도와야 하는 우리는 절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샤워할 때도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는 게 기본이라며, 전화를 늦게 받거나 답장이 10분만 늦어도 그날은 미친 듯이 깨졌다.

그 모든 상황을 남자친구는 옆에서 보고 직접 들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통화로 두 시간이 넘게 언니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는데 점점 어두워지는 내 표정을 보면서 그는 줄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처음으로 나에게 일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남자친구로서는 마땅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얼마나 불쌍했겠는가, 한 달에 100만 원 받으면서 365일 매일 24시간을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하니. 그러나 그때는 그 말도 기분이 나빴다. 내 일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선택해서 감수하는 일인데 왜 이해해주지 못하는 건가, 차라리 위로해주지! 욕먹어도 내가 먹고 울어도 내가 우는 건데 자기가 뭔데 일을 그만두라고 하나. 오히려 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내가 꿈꾸던 일이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다. 아니,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 줄 몰랐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신 그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려 했었다)


싸움이 잦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럽게 회의가 잡히고 언니들의 개인 사정 때문에 손바닥 뒤집듯 일정이 바뀌고, 선배가 퇴근하지 않으면 후배도 집에 못 가는 게 당연해서 저녁 약속은 꿈도 못 꿨다. 만나지 못하니 오해가 쌓였고, 당시 전역 후 대학교 3학년이던 그와 나는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 내가 연애 버라이어티의 막내가 됐다.

살다 살다 그렇게 다채로운 캐릭터의 사람들을 처음 봤다. 연봉이 얼마니, 집안이 어떻니, 세상에 잘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연애하겠다고 제작진과 미팅을 하고 자신을 어필하고 결국 뽑히고, 그런 그들과 촬영까지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 전부라고 생각했던 좋은 남자의 표본인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가 아니면 죽을 것 같았던 내 시야가 넓어진 기분도 들었다. 학생 대 학생으로 연애를 하다가, 학생과 직장인으로 연애하다 보니 막상 현실이 힘들어졌는데, 어느 날 문득 어른의 세계에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남자친구가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런 나의 마음은 그대로 그에게 전해졌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멀어졌다. 가끔 관계를 회복해보려 모른 척 만나도, 늘 그랬듯 불합리한 상황이 닥치며 끝이 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싸우지도 않았지만.


우리의 싸움이 잠잠해질 때쯤, 나는 많은 것에 지쳐있었다. 어쩌다 지각을 하면 어젯밤에 뭐 했니, 남자친구랑 있었니 온갖 추측이 난무했고 뭐라도 새로 사면 남자친구가 사줬니, 돈을 안 쓰네 어쩌네, 싸보이네 어쩌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방아에 올랐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일을 그만두긴 싫고 언니들의 입은 막고 싶으니 그냥 헤어졌다고 할까. 처음부터 오픈하지 말걸. 내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도 연애가 원인이 되고, 배우면 될 일도 데이트하고 오더니 정신을 놓은 일이 되는구나. 일이 아니라 연애를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언니들이 말한 연애 이야기의 뜻을 알았다. 아마 그녀들도 그렇게 헤어졌을 거다. 애석하게도 그 문제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기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말을 했겠지.


결국 나는 헤어졌다. 비단 이러한 상황이 주원인이 됐다기보다는 달라진 우리가 문제가 됐다. 그도 변했고 나도 변했다. 하하호호 웃으며 연애를 하기엔 우리가 처한 환경이 너무 달랐다. 나는 일을 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자존심이 상해 힘든 것도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이는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5년의 연애를 끝내고 나니 우습게도 일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적어도 한동안 남자 이야기로 입방아에 오르진 않았으니까. 다행히 이별을 가지고는 별 말이 없더라.


(+)


훗날 긴 시간 연애를 쉬었던 내게 "네가 그러니까 사는 게 재미없는 거야. 연애를 해야 일이 는다?"는 둥 또 입방정을 떠는 언니를 만났는데... 정말 이 바닥은 입만 조심해도 중간은 갈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주 사람 이를 갈게 만들지.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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