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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꿈을 이뤘는데요 꿈을 잃었습니다

라디오국에서의 1년

by 흐를일별진



TV 프로그램을 연이어 진행하면서도, 마음 한켠엔 라디오에 대한 로망이 남아 있었다. 들어보니 라디오로 넘어가면 적게나마 원고를 쓸 기회가 있다고 해서 틈만나면 라디오 구인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 바닥엔 '라디오 작가가 되려면 그 팀 누구든 한 명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고정 스케줄과 주말 휴일 보장. 매일 사연을 수급하고 다듬고, 오프닝을 작성하는 부담은 있겠지만 사생활이 보장되는 고정 스케줄은 모든 걸 상쇄시킬 정도로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니 자리가 안 나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다 우연히 라디오에 자리가 났다.

나와 아카데미 동기였던 언니가 (나이가 많았다) 빠르게 첫 메인을 단 프로그램이었다. 일반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닌 오디션 포맷의 프로그램이었기에 예능 쪽 작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막말로 백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제안이었으므로 듣자마자 이직을 생각했다. 다만 나를 막내로 뽑아준 메인 언니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건 도의상 문제고, 내가 의리를 지키는 만큼 그녀가 내 앞날을 지켜줄 리는 없었다. 결국 욕먹을 걸 각오하고 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언니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 라디오 이직 제안은 모두가 인정하는 기회였다.

그렇게 나는 기존 프로그램이 끝남과 동시에 라디오국으로 출근했다.




라디오국은 TV와 분위기가 아예 달랐다.

주로 음악을 다룬다는 특징답게 매니저들이 매일 드나들어 CD를 건네며 홍보를 했고, 그들을 대하는 PD들의 태도는 '갑' 그 자체 같이 보였다. 전반적으로 모든 게 오픈된 분위기인 만큼 팀 경쟁없이 두루두루 친할 것 같았으나 FM과 AM 청취율에 따라 미묘한 선 같은 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오리알 같은 팀이 바로 우리 팀이었다. 오디션이라는 특이 포맷에 연차 낮은 메인의 등장이 눈앳가시가 된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메인 언니의 (높은) 학벌이 PD와의 학연을 자랑하면서 (아마, 질투 기반의) 험담도 적지 않게 들려왔다. 그러니 그 언니가 데리고 있는 팀의 일원인 우리는 미움 받지 않으려 더 노력 해야 했다. 싹싹하게 인사했고 더 밝게 웃었다. 하지만 끝내 우리는 N층 오리알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라디오국 통틀어 우리팀의 예산이 제일 많았다더라.

그래도 괴롭힘을 당하는 것 보다는 무시당하는 쪽이 나아서 오리알이 되는 건 오히려 편했다. 독립된 공간에서 할 일만 잘 하면 문제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 문제가 터졌다.


담당 PD의 습관적 성희롱.


그분은 메인 언니가 치마를 입고 오면 늘 무언가를 떨어뜨린 척 테이블 밑으로 허리를 숙였다. 당시 메인 언니는 누가 봐도 예쁘고 매력적인 편이었는데 PD는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언니의 가슴을 보는 편이었다.


오전 생방이 끝나고 나면, 그 분은 늘 우리를 끌고 근처 백반집에 가서 막걸리를 시켰다. 술을 강요하지 않는다지만 누구의 술잔이 비어 있는 꼴을 못 봤다. 그러다 한 번은 내가 뜨거운 음식을 잘못 먹고 헉헉 거린 적이 있었다. 너무 뜨거워서 입도 못 다물고 당황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PD가 이런 말을 했다. 술이 달아 올라 한껏 붉어진 얼굴로.


“뜨거워? 벌려봐, 내가 식혀줄게”


순간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뭔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내 앞에 있던 남자 VJ의 (보이는 라디오였다)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상황파악 완료. 지금 기분이 이상해질 상황이 맞구나. 머릿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 새끼는 뭐 하는 놈일까. 짜증이 치밀었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작가가 이런 일을 당했을까. 성희롱이나 성추행도 결국엔 습관인데. 그동안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이어진 습관.


그는 뻔뻔했다. 싫다고 소리치지 않으면 상관없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저런 식의 언어와 시선 성희롱 뿐만아니라 어깨, 허벅지, 허리 등 다양한 신체부위에 나쁜 손을 휘날렸다. 아주 교묘하게.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내 선에서 나쁜 손을 차단하는 거였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줄 수 없었지만 최소한, 나는 후배를 지킬 순 있었다.


얼마 뒤부터 나는 무에타이를 배웠다. 그리곤 그가 손 지랄, 입 지랄을 떨 때마다 다가가 귀찮게 굴었다. 이러다 철컹철컹한다 신고한다며 우스갯소리를 가장해 끊임없이 그를 화두에 올렸다. 장난삼아 툭툭 치면서. 그러다보니 작가들을 대하는 (특히 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성희롱이 줄어든 건 좋았는데 내가 하는 모든 걸, 무조건 까기만 하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 까임은 작가 언니들의 언어 폭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마 뒤 그 지옥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는 그 PD를 떠나 다른 단기 프로그램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또 몇개월 뒤, 홀가분하게 라디오국을 떠났다. 누군가가 "지금 라디오를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힘든데 진짜 나갈거냐" 물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내 성향이 '안정'과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외부 촬영의 현장감이 그립기도 했다. 그리고 꿈꾸던 라디오국도 TV와 마찬가지로 더러운 구석은 엄청나게 더러웠기에, 둘다 지옥이라면 좀 더 재미난 지옥을 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N층에서 들었던 온갖 썰 중에서 기억나는 건, 와이프가 동종 업계에 있는데 회사에서 세컨을 만든 피디가 있다거나 새로 들어오는 막내를 구슬려 오피스 XXX를 만들고자 노력한 피디가 있다는 것 등등 난리도 아니었다. 비단 그 나쁜 정신이 우리 팀 피디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고 TV는 깨끗한가. 아니, 똑같다. 단 라디오와는 특성이 다르니 주로 회식자리에서 일이 일어날 뿐. 아주 작가들이 쉬운가보다. 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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