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른다섯

일이 편해지면 덜컥 겁이 난다

안정감에 익숙해지기

by 흐를일별진



나에겐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일이 익숙해지면 덜컥 겁이 난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일이 손에 익고 기계처럼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지경이 오면, 내 발전의 길이 막혀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까지 이르는 시간을 수치화하면 딱 1년이다. 나는, 1년이 지나면 일과 관련된 모든 것에 재미를 잃어버린다.


다행스럽게도 프리랜서 작가는 매번 반 강제적으로 휴식기가 생기는 직업이었다.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새로 기획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편성 계약이 주로 4회로 진행되기 때문에 (준비기간 포함) 대략 3개월이면 프로그램의 존폐가 결정됐다. 운이 좋아 연장이 되면 쭉 일을 하는 거지만 그렇지 못하면 작가는 곧바로 백수가 됐다.

난 반 고정적으로 생기는 그 시기가 좋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기획 단계의 프로그램을 찾아서 빠른 호흡으로 이직하는 상황을 즐겼다. 매번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그 사람들에게 적응하고, 나만의 업무 방식을 만드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모으고 습득한 것들은 결국 전부 내 것이 됐기 때문에 나는 이 불안정한 직업을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부터 엔터테인먼트 영상팀의 작가로 넘어오면서, 안정적인 계약직 프리랜서가 됐다. 고정적인 월급에 안정적인 업무. 심지어 빨간 날엔 무조건 쉬고 출퇴근 시간도 널널했다. 드디어 자리를 잡나 싶었지만 마의 1년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미친 듯이 일하고 아예 모든 걸 내려놓고 쉬어야 나름의 업무 밸런스가 맞는데, 계속 잔잔하기만 하니까 좀이 쑤시는 거다. 심지어 이제는 어느 정도 업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명확하게 나눌 수 있게 되면서 일에 큰 어려움이 없어졌다는 것도 나를 답답하게 했다. 일이 어렵지 않다는 것.

나는 일이 불편하고 어려운 게 좋다. 적당한 불편함은 머리가 크는 걸 방지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그 긴장감은 끊임없이 나를 발전하게 하는데 이곳엔 외부 자극이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스스로 신경 쓰고 노력해야만 발전 지향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데, 까딱하면 일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대충 하다가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



한동안 진짜 그랬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눈을 뜨면 "와 재미없다. 꿈이 더 재밌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답답함이 몰려왔다. 생산적인 회의도 없고 긍정적으로 오가는 대화도 없고, 하물며 어느 순간부터는 대립도 없었다. 뭘 하려고 하면 일을 벌인다고들 하니 작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은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장군 마냥, 그 상황을 즐기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지친다. 바쁘고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갈 순 없다. 그러다 보니 일은 익숙해지는데, 새로운 걸 할 수 없다. 와 미치는 거다.


그러다 문득 내가 '불안정'에 안 좋은 방향으로 중독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새로운 게 필요하다면 지금 이것처럼 나를 위해 글을 쓰거나 취미를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끊임없이 일로만 이 답답함을 해소하려 했으니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회사는 변하지 않을 거고 내가 이 안정을 완벽하게 포기하지 않는 한, 현 상황 유지만 계속될 테니 더더욱 해결책은 없었다. 그렇다고 매달 들어오는 이 돈을 포기할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내 고질적인 문제를 즐겨보려고 한다. 안정감에 좀이 쑤시면 그 참에 완전히 일을 내려놓고 다른 걸 발전시켜보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으면서 말이다.


안정과 편안함에 익숙해져 봐야겠다. 그 속에서 엉덩이 무겁게 글을 쓰고 사색에 잠기는 과정을 마음껏 즐기며 묘한 중독 증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열심히 일한 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나'에 취하는 것도 심각한 중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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