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만년필이 사랑에 제동을 걸었다

every moment of life

by 흐를일별진



모든 게 완벽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순간부터,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순간까지. 듣고 있던 음악은 완벽했고 나의 마음도 아주 안정적이었다. 합정의 중고 책방에서 처음 만난 그는 선한 인상의 친구였다. 살짝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묘하게 편안했다. 나는 나의 첫 호감을 숨기기 위해, 살까 말까 고민 중이던 만년필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사고 올게!”


엄청 당당한 척, 그에게 반하지 않은 척,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만년필을 구매해 가방에 넣고, 나는 그날의 만남을 이어갔다. 모처럼 즐겁게 시간을 보냈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음껏 쏟아냈다. 그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나는, 정말 완벽한 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만년필을 꺼냈다. 무광 버건디 색 만년필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가격도 품질도, 심지어 필기감도 아주 좋았다. 신이 나서 곧바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손가락이 아파 문득 정신을 차렸는데, 웬걸, 만년필 촉에서 잉크가 줄줄 새고 있었다. 손가락 한쪽이 새까맣게 물들어 갈 때까지 나는 만년필의 결함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만년필은 완벽한 하루의 상징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 누군가와의 관계도 잉크가 새는 만년필과 같은 게 아닐까.


완벽한 줄 알았던 만년필에 결함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어쩌면 자신만의 결함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결함을 몰랐던 나처럼, 우리는 모른 척 어떤 현실에서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날 하루를 완벽하다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완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랬다.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을 잊고 있었다. 늘 지레 겁먹는 소심함이자 최악을 상상하는 자기 방어였다.


실제로 그날의 만년필은 행복했던 내 마음에 확실한 제동을 걸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어. 그건 사람도 감정도 마찬가지야. 관계란 애초에 완전해질 수 없어. 절대 완벽하지 않아. 둘의 마음은 같을 수 없거든. 한 번 샌 잉크는 계속해서 새. 샐 때마다 닦으면 된다고도 말 하겠지만, 도대체 왜? 왜 그런 불편한 상황을 다시 만들려는 거야? 혼자 있으면 최소한 완벽한 척할 수는 있어! 마음을 다 잡아. 어차피 안 될 관계야. 너 혼자 착각해서 나중에 힘들어질 일을 만들지 마.”


만년필이 끊임없이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는, 만년필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때로는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결함을 인정하고 감수할 것을 각오한 채 시작해야 하는 관계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이에게 마음을 준다는 행위는, 결국 도박과도 같은 거라 생각한다.


그날 이후, 다행히 만년필의 잉크는 다시 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각오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 그나마 조금씩 나를 제어해가며,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려 했지만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것이 정리 된 지금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나 자신을 지켜보려 한다. 애써 막으려고 하지 않고, 지우려고 하지 않고, 그저 순간 순간에 드는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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