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약속
대근이를 보내주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온종일 잠만 잤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것처럼 계속해서 잤다. 한참을 자다가 밥때가 되어 엄마가 날 깨우면, 일어나 밥을 먹고는 다시 멍해졌다. 그날 하루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떠 있었다.
석이는 아침부터 내 곁에 엉덩이를 대고 누워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석이를 보면서 대근이를 떠올렸다. 울적한 기분이 들었으나 털고 일어났다. 엄마 아빠는 이미 출근한 후였기 때문에 천천히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족이 함께 살게 된 집이었지만 아직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라도 해서 도움이 되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퇴근한 엄마 아빠가 깨끗한 집에 들어오길 바라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난 후, 내 방에 앉아 뒷산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딱 2주, 2주 정도만 온전히 대근이에게 집중하자. 대근이를 잃은 슬픔이 무뎌지게 만들자. 하지만 갑작스럽게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왔으니, 언젠가는 주변 이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1주일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남은 1주일은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되,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삼자고 계획을 세웠다. 뭔가 정해지니 마음이 편해졌다. 대근이는 없지만, 결국 나는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주일.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됐다.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집 청소를 했다. 이후 석이에게 영양제를 탄 간식을 주고 한바탕 놀아준 뒤, 방에 앉아 뒷산을 바라봤다. 슬픔에 무뎌지기 위해 대근이와의 마지막 통화를 반복해서 들었다. 숨이 답답하고 가슴이 아려왔지만 계속해서 들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고, 자다 깨서 대근이를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대근이가 뒤를 돌아볼까 봐 절대 아이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생각만 했다. 잘 지내니, 잘 가고 있니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대근이가 윤회의 절차를 밟고 있길 바라면서, 곁에 대근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엄마 아빠 앞에선 조금씩 나아지는 척했지만, 자주 악몽을 꿨다.
석이는 내 곁을 지켰다. 가끔 대근이가 생각나 미칠 것 같을 때, 석이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의 냄새를 맡았다. 석이에게선 나무 냄새가 났다. 대근이 대신 석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럼 그때마다 석이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1주일이 끝날 무렵,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SNS에 올릴 글의 초고를 위해서였다. 대근이와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에 내 주변 모든 이들은 내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무심결에 한 말이 내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든 일을 방지하고 싶었다.
내가 쓴 글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7년 동안 함께한 반려묘 대근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혼자 서울에 있을 수 없어서 집을 내놓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당분간은 서울과 부산에 오가면서 작가 일을 계속할 것이고 평소 하고 싶었던 문구 사업을 준비할 예정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잘 털고 일어날 테니 기다려달라”는 글이었다.
짧은 문장으로 고작 10줄. 그런데 그 글을 쓰는 데 꼬박 하루를 썼다. 한 줄을 쓰고 눈물이 터지고 또 한 줄을 쓰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난 하나도 괜찮아지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1주일.
상근으로 일하던 엔터테인먼트의 마지막 출근 날. 회사에 남은 내 짐을 챙기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로 향했다. KTX를 타고 한때 대근이와 오가던 그 길을 생각하면서 미리 써두었던 글을 퇴고했다. 울컥했지만 잘 참아냈다. SNS에 글을 업로드하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서울은 대근이를 잃은 곳이었기에, 그 땅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나를 기억의 소용돌이에 몰아넣는 것만 같았다. 늪. 나는 슬픔의 늪에 서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듯한 아픔 뒤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회사에 도착해 짐을 챙겼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필요한 것만 챙겼다. 우습게도 최근에 이사한 덕인지 짐을 정리하는 기술이 압도적으로 늘었다. 짐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내 상황을 알고 있는 몇몇 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후배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았고, 친했던 감독님은 “대근이 어떡해?”라며 불시에 현실을 깨닫게 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태연한 척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어떤 이는 “그러게 방묘창이 얼마나 중요한데! 나는~ SDQ@WEDSs”라며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고양이 케어 방법을 줄줄이 늘어놨다. 타인의 비극을 통해 자신을 올려치기 하는 최악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자기 고양이는 언제까지고 오래 살 거라 생각하는 건가.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나. 내가 그 사람과 다른 게 뭐가 있나.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쓸데없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그리곤 작가 후배와 회사 내 친했던 몇몇 사람들과 짧은 술자리를 가졌다. 나는 술 대신 음료로 그들과 함께했다. 내가 슬픔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음악과 술 같은, 감정에 자극을 줄 만한 것들을 모두 차단하는 거였다. 온전히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분위기가 섞이면 안 됐다. 내 슬픔은 나의 것일 뿐이고 남들에겐 저마다의 답답함이 있었으니, 술자리의 화두는 내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다행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근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우리는) 엔터테인먼트의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슬픔을 잊기에 괜찮은 듯했으나,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그날 밤 조카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까지도 모든 게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울적해졌다. 다만 그 울적함에 달라진 게 있다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 추가됐다는 거였다. 서울은 물리적으로 더 멀어졌지만 내 일과는 여전히 가까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무엇하나 제대로 정리된 게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부산으로 도망을 친 거고 한숨 돌리고 나니 현실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여전히 슬펐고 여전히 미래는 불투명했다.
한참을 이 생각 저 생각 답이 없는 생각에 몰두하다 부산에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뒤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나 더 정했다. 계획한 2주가 끝나면,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을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남겨보자. 사고가 일어난 당시부터 슬픔을 극복하고자 했던 나의 모든 노력을 글로 남기자.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경각심을 줄 수도 있겠지. 이러나저러나 나는 작가였고, 작가의 일을 놓지 않는다면 다시 미래가 투명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2주 뒤.
나는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