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별은 예정돼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그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슬픔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려야 했기에, 해가 떠 있는 동안 나는 매일 울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 낮이 온전히 내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사고가 났던 그 순간의 글을 쓸 때는 미칠 것만 같았다. 글에 ‘대근이’ ‘아이’ 등의 대근이를 지칭하는 단어만 나와도 눈물이 쏟아졌다. 몇 줄을 쓰고 멈추고 또다시 몇 줄을 쓰고 멈췄다. 가슴을 치고 몸을 말고 누웠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그 모든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구나. 상황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슬픔이라는 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뿐이구나. 상실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모든 물건을 버린 거구나, 나는.
글을 쓴 지 며칠이 지났을 때부터는 거의 고문을 당하는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눈물이 나면 닦지도 않았고 울음소리가 날 것 같으면 입술을 깨물었다. 슬픔을 참아낸 것이 아니라 슬픔을 쏟아내되 글로 옮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보니 점점 글 쓰는 속도가 빨라지고 눈물이 줄어들었다. 물론 다음 날 글을 쓰기 위해 전날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며 감정을 잡다 보면 이내 슬퍼지곤 했지만, 이제야말로 정말 무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에 첨부할 대근이의 사진을 고르는 과정도 점점 편해졌다. 아이가 없다는 현실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졌지만, 그만큼 대근이와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도 또렷해졌다. 내가 찍어놓은 아이의 모든 사진이 그걸 증명했다. 나는 글을 쓰며 내 감정에 이름을 붙였고, 겪었던 일을 슬픔으로 왜곡하지 않았다. 받아들였고 강제로 마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7월. 대근이 없이 근 한 달을 보냈다.
엄마 아빠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치 주지 않았고 가끔 멍해지는 나를 모른 척해주었다. 나의 ‘괜찮음’이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보냈다.
다만 밖에서 고양이 소리가 나거나 뭔가 떨어지는 듯한 ‘쿵’ 소리만 나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느낄 만큼 두려움이 엄습했다. 뭔가를 요구하는 대근이의 목소리, 그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소리가 들리면 하고 있던 모든 동작을 멈췄다. 마치 내 머리와 몸이 고장 난 것처럼. 대근이가 왔을 리 없는데, 아주 잠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니 점점 무뎌졌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묘한 두려움이 곁을 맴돌았다. 지금 함께 지내고 있는 본가 고양이, 칠석이에 대한 거였다. 사람보다 더 빠른 시간을 사는 동물들. 석이도 언젠간 우리보다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너게 될 건데, 그때 이 슬픔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답답해졌다. 엄마도 분명, 나와 대근이의 일을 통해서 석이와의 이별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지내는 부산 본가는 오래된 구축 빌라다. 엄마 아빠의 손으로 생활에 필요한 부분들만 조금씩 고쳤을 뿐, 기존 주인이 지내던 집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나마 지금은 따로 살던 내가 들어와 있으니 방을 꾸미고 거실을 꾸미는 등 (엄마 말에 의하면) 이제야 ‘집’다워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언젠가는 전체적인 수리가 필요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한 번은 엄마와 리모델링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디를 어떻게 고치고 싶은지, 방을 어떻게 트고 싶은지. 직접 하는 것 보다는 리모델링 업체를 끼고 제대로 고쳐야 하지 않겠냐, 훗날 깨끗하게 변할 집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겉으로 보기엔 집에 대한 단편적 대화였지만 나는 왠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대화에는 정확한 시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언젠가는’ ‘나중에’라는 단어로 닥쳐올 무언가를 예상했을 뿐. 닥쳐올 무언가, 그건 석이를 잃는 일을 의미했다. 엄마와 나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 집을 리모델링 하게 된다면 그때는 석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이후라는 걸. 내가 대근이를 잃고 서울이 힘들어 떠난 것처럼 오래된 이 집이 새 옷을 입을 때는 석이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될 거다. 석이의 흔적을 지우듯, 슬픔을 잊기 위해 모든 걸 바꾸게 되겠지. 엄마와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대근이를 잃은 슬픔은 내가 가장 컸다. 나 혼자 견뎌내면 됐고 나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슬픈 건 좀 다른 일이라서, 이르게 걱정이 됐다. 대근이가 나의 전부였다면 석이는 엄마 아빠의 일상 그 자체와도 같았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걱정에 대비하는 나의 태도였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진짜 잃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반려동물의 시간. 사무치는 슬픔으로 알게 된 시간의 끝은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했다. 그러니 이 순간, 한 번이라도 더 아이를 바라보고 사랑한다 말하고 놀아주고 함께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내가 대근이에게 소홀했다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함께 있는 시간을 가볍게 생각했다면 나는 더 긴 시간을 아파했을 거다. 숨 쉬듯 후회했을 거고 죄책감과 미안함, 안타까움의 감정 때문에 쭉 과거에 머물러 있었을 거다. 대근이도 나를 떠나지 못했을 거고. 끝내 모두의 과거가 미련이 되어 부정적으로 이 땅에 남았을 지도 모른다. 사고의 인과에 대해선 마땅히 후회와 반성이 남아야 하지만 아이와 나의 시간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