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의 위안은 필요없다
누가 그랬다. “불행한 건 아니잖아.”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집에 가는 내내 그 말이 맴돌았다. 누군가가 행복하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불행하냐 묻는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의 비극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아니, 그걸 불행이라 말하기엔 내가 살만하니까. 불행하다고 할 만큼 비극적이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비극적인 삶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어디선가 봤던 것, 우리가 매체를 통해 보고 있는 것. 편견, 오만, 모든 비교 감정의 집합체. 우리는 오만으로 비극적인 삶을 판단한다. 그 말은 곧 내가 보아온 타인의 비극이 있으니, 그것과 비교해 내 삶을 불행으로 재단하기엔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거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니까. 사실 그런 마음이 든다는 건 불행하지 않다는 뜻이며, 내가 비극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에 취해 있었다는 뜻이다. 닥친 불행을 몇 배나 과장하면서.
불행 포르노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힘듦과 비극을 양분 삼아 내 삶이 더 낫다는 자위. 남을 내려침과 동시에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아이러니. 누군가를 돕는 행위도 어떨 땐 위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봉사라는 말이 불행 포르노에 기반을 둔 비교의 위안 같을 때도 있고. 순수한 마음을 왜곡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이고 누군가를 위한다는 행위는 결국 자기만족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올려치기나 내려치기의 형태를 보일 경우에는 문제가 된다.
나는 미치도록 오만했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내가 나으니까 저 사람을 도울까. 상대적으로 불행한 나에 취해 비극의 여주인공을 연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그 시기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일부러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 보며 나는 그래도 괜찮지 자위하곤 했다. 그러한 심리 상태는 나를 좀먹었다. 너무나도 쉽게 마음으로 남을 내려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시야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자위를 멈췄다. 생각을 컨트롤 해야만 했다. 그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예상하지 않아야만 했다. 딱히 과거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가 중요할 뿐이었다. 곁에 있는 이들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지 않았다. 듣지 못한 건 예상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내가 나를 향해 실수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내 행복과 불행의 기준에 타인의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온전히 내 마음이 중요할 뿐 가능하면 남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 가장 좋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엔 일찌감치 생각을 거뒀다. 지금, 무조건 지금에 따라 모든 걸 받아들였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살되, 나에 대한 부분은 복잡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 복잡함은 내 몫. 과정에 어떠한 잡음도 있어선 안 된다. 내가 나로 바로서는 일에 타인은 필요치 않다. 비교의 위안, 비교의 행복, 남과 비교해 내 가치를 찾는 행위는 찰나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가치 있었던 적도 없다. 모든 건 착각이었을 뿐.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면 불행 포르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게 위안이 되는 건 알지만,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니까.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휘둘리는 삶을 살 것인가. 온전히 나의 힘으로 불행과 행복을 받아내는 삶을 살 것인가. 당당하게 불행하다고 말하고 당당하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삶을 살고 싶다. 비교 없이 온전히 내가 이룩한 성과를 즐기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난 마음으로도 죄를 짓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