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는 사랑의 형태
계절을 상징하는 영화들이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의지와 관계없이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
덥고 습하고 끈적이는 날씨.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스치듯 사람들이 오가는 홍콩의 거리. 탈탈 털리듯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쐬고 있는 주인공. 하얀 민소매. 원색의 공간. 담배.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 홍콩의 밤거리. 공중전화. 꺼질 것 같이 푹신한 침대. 엇갈리는 시선. 닿을 듯 말 듯 자극적인 스킨십.
왕가위 감독이 첫사랑과 10년 동안 연애한 후 결혼했다는 게 충격적이긴 한데... (실연의 상처를 모른다니!) 그런 그가 표현하는 사랑이 그렇게 아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생각해보면 그의 영화 속 사랑에는 계산이 없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투명하게 전달한다. 간혹 그 마음이 비뚤어지거나 어긋나 보일 순 있지만, 결국에는 그 사랑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치 사랑만이 가장완벽한 명약이라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왕가위 감독이 구축한 또 다른 사랑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어제 <아비정전>을 다시 봤고 모처럼 여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무르익어 가는 가을, 공기가 가벼워지는 겨울의 문턱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낭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