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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지만 우아하게 Nov 21. 2016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おおきなかぶ,むずかしいアボカド: 村上ラヂオ(2)

글, 그리고 길


배낭을 메고 길에 오르듯 글과 함께 길에 오른다. 때론 글이 길을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길 위에서 글을 마주하기도 한다. 시와 철학은 우리의 삶을 낯설게 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며 오래된 자신을 만난다.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서 시와 철학자가 된다. 길 위에서 글을 만난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조금은 가볍게 책 한 권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글이다. '앙앙(anan)'이라는 잡지에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에세이의 한 해 분을 모았다. 첫 장을 넘기면 다홍색 색지에 'Dear...'으로 시작하는 짧은 손글씨가 있다. 소박한 결혼선물에 대한 선배의 답례인 셈이다. 


제법 많은 책을 샀을 텐데 내 책장은 늘 한적하다. 책을 읽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책을 선물하는 탓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책이 더욱 특별하게 기억된다. 여담이지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은 장영희 교수님의 축복이다. 내가 사랑하는 책이다.


지금은 무디고 무뎌져 오히려 서글픔으로 기억되는 어린 시절, 길가에 놓인 돌멩이에 조그만 종이우산을 씌워준 적이 있다. 돌멩이가 가여웠다면 너무 거창할까? 그날은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루키 씨도 그런 사람인가 보다. 채소의 기분을 상상하는 건 비단 소설가만의 특권은 아니라면 좋겠다. 그러기에는 세상은 푸르고 바람은 시원하다. 그래도 하루키 씨를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직 바다표범의 키스까지는 상상해보지 못했다. 하루키 씨의 승리다. 축하를 전하며, (책의 문체를 슬쩍...)


에세이를 모아둔 책을 읽으면 시시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쩌면 시시한 사람들이 시시한 세상을 살아가는 시시한 이야기가 바로 글 아닐까? 생각의 흐름을 이어놓은 소설도 좋다.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도 물론 좋다. 하지만 생각을 따라 흐르며 때로는 그 흐름조차 잊는 일상의 소소함이 참 좋다. 마치 한없이 진지한 표정의 우리와 그런 무서운 표정 앞에 주눅 든 또 다른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무거운 세상이다. 그 속에 우린 바람 위에 오르는 가벼움이 필요하다.


오늘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어떤 상상을 하게 될까? 채소가 아니어도 괜찮다. 바다표범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래도 우린 채소와 바다표범보다 멋진 삶일 테니까. 아니라면 이제부터 애쓰면 될 일이다. 물론 나는 채소와 바다표범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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