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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지만 우아하게 Nov 23. 2016

착한 건망증

잊어도 괜찮아

나는 읽기를 좋아하고 쓰는 게 조금 더 좋다. 문제는 글을 모아두지 못한다. 싫은 게 아니라 어렵다. 노력해도 잘 안됐거든. 메모장과 펜을 가지고 다니는 준비성은 물론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도 그렇단다. 작가의 시대상이 바뀌고 있다... 며 위로를 훌쩍 뛰어넘은 상상을 시작한다. 그래도 좋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손에 가까이 잡히는 무언가에 글을 쓰곤 한다. 카페에 있는 사각 냅킨은 글쓰기에 좋다. 길가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도 괜찮다. 종이로 된 컵 홀더는 골판지 느낌이 나서 좋다. 대학원 졸업논문도 상당 부분 화장지와 냅킨에 적어둔 글을 어렵게 모아서 완성했다. 정말이다. 외국에서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게 언뜻 시너지가 있을 것 같지만 흰자와 노른자를 섞은 거품기에서 수영하는 기분이다. 물론 해본 적은 없다, 수영은 수영장에서! 그런 나에게 낙서처럼 적어둔 생각의 조각은 작은 피난처였다.


왠지 딴짓을 해야 일이 잘 된다. 유독 잠들기 전에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다. 새로운 인종, 호모 사피엔스 x3의 등장을 축하하며. 친한 외국인 친구들은 내 취미를 잘 안다. 아. 무. 것. 도. 안. 하. 기. 면접용 취미도 몇 가지 있다. 선택적 준비성의 나쁜 예라고 할 수 있다. 밤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근처에 메모장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자고 있다. 눈 감으면 잔다. 정말 잘 잔다. 분명 잠들었는데 동시에 생각이 떠오르는 건 신기한 경험이다.


메모를 안 해서인지 생각을 꿈꾼다. 다시 아침이다. 대부분 꿈이 기억난다. 신이 난다. 하지만 여전히 근처에 메모장이 없다. 그리고 잊는다. 무한반복... 물론 메모장을 두고 잔 적도 있지만 이런 건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습성이다. 나의 게으름으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는 이제 이끼가 껴서 버섯이 자랄 것만 같다. 이왕이면 세계 3대 식재료인 송로버섯이 자라면 좋겠다. 무럭무럭.


결론은... 도무지 없다. 그저 나는 잘 쓰고 잘 생각하고 잘 잊는다. 무려 뇌 MRA 검사를 했는데 정상이라고 한다. 나는 잘 잊는 게 정상인 사람인가 보다. 그럼 좋은 뜻인 걸까? 잠시 고민... 무엇가를 잊었다면 그건 잊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우리가 여전히 기억하는 소중한 것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건망증이 우리 삶을 조금은 더 가볍게 해 준다고. 그래도 하루 세 번 양치질은 잊지 말자. 지구의 평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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