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디지만 우아하게 Aug 23. 2018

아픔이 길이 되려면

글, 그리고 길


배낭을 메고 길에 오르듯 글과 함께 길에 오른다. 때론 글이 길을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길 위에서 글을 마주하기도 한다. 시와 철학은 우리의 삶을 낯설게 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며 오래된 자신을 만난다.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서 시와 철학자가 된다. 길 위에서 글을 만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서정적인 제목의 책은 역학, 조금 더 정확하게는 사회역학에 관한 글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분야는 아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어깨너머로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오롯이 사회역학을 위해 쓰인 글은 처음이다. 낯선 분야를 친숙한 이름으로, 복잡한 연구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고맙다. 한 편의 글을 읽어도 학자의 길을 선택한 저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을 읽으며 세 권의 다른 책이 떠올랐다. 책이라기보단 논문에 가까운 글들이다. 책의 마지막 글에서 확신했다. 내가 다른 글들을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여기에 글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 안에 떠오른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모여서 하나의 생각으로 연결되다. 이런 건 좀처럼 드문 경험이다.


글 1번.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가 있다. 로버트 푸트넘 교수가 소개한 개념이다. 비단 사회과학의 이론을 넘어 이제는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한 없이 어렵지만 쉽게 보면 매일 이웃에게 건네는 인사와 따뜻한 미소가 사회적 자본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유대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자본에 기반한다. 자본이 무엇을 의미하든 바야흐로 우리가 함께하는 모든 일상이 사회를 형성하는 자본이 되고 있다.


글 2번. 민족주의는 사회과학의 오랜 연구주제다. 회색지대를 제외하고 민족주의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크게 두 갈래가 존재한다. primordial vs modern. 전자는 민족주의의 선천성을, 후자는 후천성을 강조한다. 베네딕트 엔더슨 교수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는 후자를 대표한다. 제목 그대로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라는 주장이다. 이 유서 깊은 저서에 대응하는 글이 있다. 제목은 'Who's Imagined Community?'.


책에서 저자는 질병의 원인을 이야기한다. 병리현상은 각각의 원인이 있다. 사회적 병리현상도 마찬가지다. 역학자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질병에 대한 많은 정보를 습득했다. 흡연은 폐암의 원인이다. 고독은 고독사의 원인이다. 실상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폐암의 원인은 너무 많다. 그래서 모든 원인들을 하나의 집합체처럼 거미줄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인들의 원인, the cause of the causes는 무엇일까? 나는 이런 조금은 집요한 역발상이 좋다.


글 3번. 책의 마지막 글에서 저자는 말한다. 아픔을 겪은 사람들만이 아픔을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치유는 오직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있다. 저자가 말한 아픔이 길이 되는 길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그의 저서 'Pedagogy of the Oppressed'에서 오직 억눌린 자들만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를 치유하고 이웃을 치유하고 나아가 본인들을 상처 입힌 이들과 사회구조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억눌린 자들에게 있다. 책에 담긴 저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두 저자의 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내 학위논문도 같은 생각을 담고 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안전하다. 저자의 말이 진실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어쩌면 끝이 정해진 이야기라 해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