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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지만 우아하게 Feb 11. 2019

데미안

Demian


글, 그리고 길


배낭을 메고 길에 오르듯 글과 함께 길에 오른다. 때론 글이 길을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길 위에서 글을 마주하기도 한다. 시와 철학은 우리의 삶을 낯설게 한다. 우리는 여행을 하며 오래된 자신을 만난다.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서 시와 철학자가 된다. 길 위에서 글을 만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다. 영어에는 'read Hermann Hesse'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는 보통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고 말한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헤르만 헤세를 읽었다고 말한다. 직역하면 한없이 어색하다. "너 장영희(작가) 읽어봤어?" 문화에 뿌리를 둔 언어의 차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데미안을 읽는다. 소위 말하는 팩트다. 하지만 그만큼 분명한 사실은 나는 데미안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를 읽는다. 데미안을 읽었다고 전부를 이해할 수 없듯이 그의 모든 저서를 읽더라도 헤르만 헤세는 늘 그 자리에서 새로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 헤세의 말이다. 우리에게는 특유의 말버릇이 있다. 이런 건 인식하지 않으면 늘 곁에 머물고 억지로 의식하더라도 좀처럼 자연스럽지 않다. 글도 그렇다. 문체와 생각은 작품을 달리해도 쉽사리 흐려지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는 늘 음악과 채소와 고양이가 있다. 좋아하는 걸 적는 게 좋다는 단순한 이유다. 헤세의 글에는 늘 시인이 등장한다. 하일러처럼 노골적인 시인이거나, 한스처럼 그런 시인을 동경하거나, 아니면 싱클레어처럼 시인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모습은 달라도 모두 시인이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다.


데미안. 지독하리만큼 끈기 있는 자기 성찰. 그리고 아브락사스와 데미안으로 표현될 만큼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 복잡한 듯 보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헤세의 글은 한결같다. 오직 하일러를 통해 다른 세상을 엿보던 한스와는 달리 스스로에게서 데미안을 발견해 낸 싱클레어의 성장만이 다를 뿐이다. 어쩌면 성장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대로 두는 편이 좋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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