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디지만 우아하게 Jan 30. 2017

자유로움

더디지만 우아하게

평범한 일상이 문득 불편해지는 순간이 있다. 격식이라는 녀석이 찾아왔다. 글쓰기도 그렇다. 주저리주저리... 순간을 기록하던 글이 어느새 상상도 못 한 유려한 문장이 되어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도 삭발이나 장 비슷한 머리를 했었다. 태양을 머금은 머리가 자꾸만 붉어졌다. 애지중지 하진 않았지만 익숙한 꽁지머리는 귀국과 동시에 작별했다. 격식의 승리다.


소중하게 여기는 옷이 있다. 3장 묶음으로 파는 B사의 흰색 무지 티셔츠다. 3년 전, 축제에서 정말이지 정신없이 물감 섞인 물폭탄을 맞았다. 낯선 외국인인 나는 집중 공격 대상이었다. 덕분에 아끼던 티셔츠는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닳고 닳아 균형이 맞지 않았지만 색깔을 입힌 수묵화처럼 은은한 느낌이 좋았다. 옷 살 돈이 없느냐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정말 돈이 없었다면 조금은 슬펐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수채화를 담은 티셔츠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2-3번 정도 입었는데 지금은 서랍장에서 영면 중이다. 이번에도 격식이 이겼다.


뜬금없이 더디지만 우아하고 싶다. 내가 감탄했던 세상은 늘 꾸밈이 없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지금은 따라 할 수 없는 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의 세상이 내 미소보다 더 찬란해서 어색할 여유조차 없었다. 요즘은 왠지 웃을 때면 낯선 이방인이 된 것만 같다. 마음이 가난해졌나 보다. 티셔츠 한 장도 살 수 없는 가난함은 아니여야 할 텐데.


자유로움은 더딘 발걸음 위에 담긴 우아함이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위대한 개츠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