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의 이야기
얼굴을 자꾸만 씻고 싶다. 물을 끓이면 기포가 올라오다가 사라질 듯 울분을 토한다. 냉장고 속에서 하얀 심장이 금이 갈 듯 부여잡는다. 피를 섞으면 물은 진해진다. 더러운 손을 헹구면 비누거품과 함께 세균이 녹아 맛볼 수 없는 구정물이 된다.
나는 물이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저 얼굴, 얼굴이 익숙하지 않다. 누구인지 묻는다. 악수도 받지 못한다. 내 농담을 이해하지만, 말이 겹쳐 서로 듣지 못한다. 차라리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거울을 하나둘 부순다.
나를 바라보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퍽 낯설다. 직장의 동료 몇 명은 내 이야기에 섬뜩 놀란다. 마치 날고기를 맨 손으로 뜯는 0.3초간의 혐오지만, 대낮의 태양만큼 명확하게 보인다.
저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내가 이상한 건가? 미쳤다는 기준이 뭘까? 수학책에서는 표준편차 범위 5퍼센트 안팎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잡는다고 한다. 상위 5퍼센트도 잡는 건가? 일단 우리나라의 숫자를 n값에 넣는다면, 아니, 전체 통계 표준 숫자를 먼저 이상적으로 잡아야 하는 건가? 관자놀이 양 쪽의 혈관이 뜨겁게 뇌를 때리기 시작한다.
C는 내 두통에 대해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직장 동료다. 키는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남성이지만 C와의 이야기는 두통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된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헛소리를 조잘대도 일단 묵묵히 듣는다.
C의 표정도 웃기다. 내가 가진 웃긴 농담에도, 무서운 뒷담들에도 무표정하게 일관한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표정인가? 그건 아니다. C의 귀는 항상 민감하게 나에게 열려있다. 한 달 전 흘기듯 말한 농담의 단어 하나까지 기억을 하고 있다.
맨 처음부터 C가 마냥 착한 건지, 나에게 관심을 가져서 매력을 표현하는 건지 헷갈린다. 용기를 내서 한번 물어보는 것도 좋겠지. 부끄러움은 잠깐이니까. 하지만 이 말을 계속 기억하면 어쩌지. 토씨 하나 기억하는 사람인데.
C는 괜찮다면 퇴근할 때마다 “지금 집에 가실 거면 데려다 드릴게요.”라고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덕분에 저녁마다 혼자 우는 퇴근길이 줄어들고 있다. 15분. C의 검정 소형차 오른쪽 조수석에서 조잘대며 C와 단 둘이 갇혀있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C의 조수석에는 특유의 담배연기와 남자의 땀내가 항상 같이 동승한다. 맨 처음에는 ‘남자라면 그렇지’ 정도로 넘기며 웃으며 넘겼지만, 지금은 C의 차 냄새가 좋다. 나는 흡연을 하진 않는다. 담배를 편의점에서 한 번도 구매해본 적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다. 그저 독한 니코틴의 체취가 C의 일부라서 좋다. 그의 영역에 침범하여 공기를 훔쳐가는 도둑이 된 기분이다.
C와 같이 퇴근하던 어느 날, ‘불타는 삼겹살’이란 이름의 음식점 간판이 창밖으로 보인다. 폐업한 망한 가게인 듯싶다. “적당히 불탔어야지, 가게까지 망해버리게.” 생각 없이 혼잣말을 내뱉는데, C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며 질문을 꺼내려다 꺽꺽거리며 혼자 웃기 시작한다.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웃긴 농담도 아닌데. 독특한 농담을 좋아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숨을 토해내듯 바보같이 웃는 C가 낯설게 귀엽고, 이상하게 웃기다. 나도 덩달아 웃는다. 차는 멈춘다.
나는 같이 웃으면서 몇 년 만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다시 느낀다. 나는 살아있다. 웃겨야 웃지 않는다. 아프도록 웃어볼 수 있다. 타인을 웃길 수 있다. 웃음을 보고 같이 웃을 수 있다.
C에게 처음으로 솔직한 말들을 꺼낸다. 나는 어떤 사람 같으냐고. C는 눈을 곰곰이 돌리다 말한다. “넌 생각이 많지, 사소한 것도 다 기억하고 맞춰주려 하지. 꼭 우리 집 강아지 같아.”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다.
“우리 집 강아지, 옆집 수의사 아저씨네 집에서 주워온 애거든. 아픈 개들 사이에서 주어온 놈이다 보니 버림받지 않으려고 별간 애를 쓰는 거 같아. 너도 짜증나면 똥 누고 싶은 개 마냥 낑낑대잖아. 그런데 회사라서 그러지도 못하고.”
나는 C의 대답을 혀끝에 올려 천천히 굴린다. 무언가 버티려고 했던 걸까? 이빨을 가지런히 꽉 물지만 입 끝이 어떻게 해도 올라가지 못하고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왜 나는 C의 말을 부정하고 싶을까. 나를 개에 버려진 유기된 강아지로 비유한 C의 발언에 분개한 건 아니다.
C의 틀렸다면 헛소리라 치부하며 그럴듯하게 C의 비위를 맞추며 넘어 갔을 거다. C가 맞는 말을 했다면, 나는 버려진 강아지다. 수의사 집에 버려놓고 도망간 병든 강아지. 낑낑거림. 나는 내가 다시 버려질 까 두려워 한다는 이 말에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비집고 나온다.
나는 애꿎은 C에게 이빨을 드러낸다. 왜 내 마음을 쑤셔서 속상하게 하느냐고. 오늘, 아니 방금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참 좋은 하루였다. 잘 마무리해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 끝을 망쳐놓느냐. C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안다. 하지만 억눌린 말은 대상을 잃고 터져 나와서 갈 곳을 잃어버린다.
그 순간 C는 나보다 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나는 당황스럽게 눈물을 집어넣는다. C에게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C는 가슴을 부여잡고 미안하다고 아파한다. 나는 “나도 안 울고 있는데, 네가 왜 우냐.”라고 헛웃음을 짓는다. C는 듣지도 못한 채 계속 운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갈비뼈 사이를 찔린 듯 힘겨워 한다.
C가 힘들어 나를 보고 고통스러워한다. 옛 동화에서 아이가 열병을 앓을 때, 제 어미가 어찌할 줄 모르고 눈물만 지으며 “내가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이라며 흐느끼듯이. 사람과의 만남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었나? 연민과 공감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스친다.
나는 아마 공감을 모르는 짐승인가보다. 그런 내가 싫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C가 가지고 있는 공감을 가지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 포근함을 맛볼 수 있을까? C가 가진 저 따스한 연민의 감정을 가진다면, 나도 C처럼 다정하게 마음까지 포옹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연민을 배우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뜨거운 언어를 내뱉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말을 할지 몰라 말을 잃는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울고 있는 저 뜨겁게 적셔진 C의 마음을 씹어서 먹고 싶어졌다. 나는 울고 있는 C의 눈물을 혀로 훔친다. 연민의 눈물은 바다의 맛이다. 오묘하고 뜨거운 소금기로 다져진 바다조개가 이빨 사이에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