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의 이야기
나는 어떤 맛을 지녔을까?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잘생긴 A, 아기 같은 B, 따뜻한 눈물을 가진 C까지. 그들은 전부 다른 얼굴을 가졌지만, 내겐 같은 맛이었다. 세상엔 맛있는 남자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의 맛을 음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내 아버지는 사고로 다리를 잃은 후, 술 없인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는 재활센터와 상담 프로그램을 전전했지만, 모든 시도는 헛수고였다. 그때부터, 삶의 무게에서 자식들을 건져 올리는 일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첫째 형은 음악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형의 악기를 보란듯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대신 향후 필요하게 될 자격증, 필기노트, 모의고사 문제집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여름에, 형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뇌졸중이라고 했다.
그날, 어머니는 의식을 잃은 형을 울면서 발로 찼다. 원망스러운 자신을 찬 걸까, 아버지의 잔재를 찬 걸까.
아무래도 좋다. 나는 '부모처럼 미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욕심을 남에게 던지는 과한 짐덩이 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고.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경기도 외곽에 방 한 칸을 얻었다. 어머니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라며 손가락질했고, 아버지는 말없이 10만 원을 쥐여주었다.
떠나는 날에 어머니는 사과 상자 하나를 안겨주었다. 그 안엔 650만 원이 든 봉투, 새 옷과 속옷, 편지와 집반찬이 정갈히 담겨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왜 이제야 부모 행세를 하느냔 분노. 그러나 돈은 간절했고, 정색한 부모의 표정에 울컥했다.
“다시는, 다시는 날 찾지 마세요.”
그 말로 나는 부모와 연을 끊었다.
어른의 삶은 무서웠다. 납부할 세금, 옮겨야 할 등기, 감당할 폭언.
나는 학원에 겨우 취직해서 사냥당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중 하나는 성폭력이었다.
술에 취한 회식 날, 기억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땐 모텔의 낡은 커튼, 뿌연 담배 연기, 그리고 벌거벗은 상사가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몸을 긁었다. 혀끝에 쓴맛이 맴돌았고, 속이 뒤집혔다.
구토와 함께 치솟은 말 한마디가 보였다.
'나는 잡아 먹혔다, 그것도 매우 나약하게'
2주가 지나서야 그것이 강간임을 인식했다. 이 세상은 나를 사냥했다. 분노는 그제야 끓어올랐다.
왜, 내가 사냥감이어야 하지? 왜 우습고, 왜 만만해 보였지? 스스로에게 분노했고, 무방비한 모습에 치를 떨었다. 그때 어머니가 떠올랐다. 피식자로서의 분노, 생존자로서의 고된 열망.
나는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흉내를 내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그리고 A를 만났다. 완벽한 외모, 사냥감을 고르는 눈빛.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는 나를 삼켰다.
B는 부서졌다. 그가 이상한 줄 알았다.
아니, 그를 통해 내 허기를 채우려던 내가 더 이상했던 것이다.
아이 같은 그의 눈물이 지금도 머릿속에 맴돈다.
C는 달랐다.
그는 무채색의 사람이었다.
포식자도, 피식자도 아닌.
그와 함께라면 괜찮을까. 아직 모르겠다.
지금, 내 입가에 남은 피의 맛은 누구의 것일까.
사랑을 씹고, 삼키고, 토해내는 괴물. 그것이 나였다.
거울에는 그저 새빨간 짐승만이 보인다.
나는 밑바닥을 모르는 허기를 끝내기 위해, 나 자신을 먹기로 한다.
흰 욕조에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양치를 한다.
이내 앉아서 내 이빨이 팔을 물어뜯는다.
빨간 피가, 구슬프게 흐른다.
무수한 가시같던 분노도, 버림당한 억울함도.
빨갛게 내 시야를 흩트리던 무언가가 드디어 연기가 되어 풀려난다.
세상으로부터 드디어 자유롭게 도망칠 수 있어.
내 심장은 처음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법을 깨닫는다.
그 무엇보다 뜨겁고, 달콤하지만 쓰라린 맛이 입에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