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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숙희 Sep 20. 2023

번역기야 물러가라?!

프리랜서 일기_2023년 9월 20일

     번역 아카데미를 다닐 때 번역기를 사용하면 좋은 문장이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좋은 문장'과 '효율성' 중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우선 출판번역에서 번역기가 유용할 때는 120 billion, 340 trillion 등 0의 개수가 여섯 개를 넘어가는 숫자를 번역할 때뿐이다. 번역기를 잘 사용하려면 육하원칙에 맞고 수식어구나 절이 최대한 적은 명확한 문장을 넣어야 하는데, 책 한 권을 모두 명쾌한 문장으로 쓰는 작가는 없을뿐더러 작품 분위기와 맥락에 맞게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일이 도저히 손에 안 잡히거나 마음이 들떠서 진도가 안 나갈 때 브레인스토밍 겸 번역기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어차피 나중에 문장을 다듬으려면 번역기 없이 작업할 때만큼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한다. 한두 문단짜리 글이야 어색한 문장이 끼어있어도 불편하지 않지만 분량이 책 한 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 기술 번역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산업 번역 분야에서는 이미 기계 변역을 널리 활용하고 있다. 기계 번역을 사용한 작업을 MTPE(Machine Translation Post Editing)라고 하는데, 이때 번역사들의 역할은 기계가 번역해 놓은 문장을 다듬는 것이다. 제품 사용 설명서나 설치 매뉴얼, 또는 비교적 완벽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서를 번역할 때는 기계 번역이 유용하다. 그래서 MTPE 작업의 단가는 원 단가의 50% 정도로 책정된다. 개인적으로 MTPE 작업은 너무 번거롭고 헷갈린다. 영어 문장과 한국어 문장을 비교하며 번역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내가 쓴 문장이 아니다 보니 한국어 문장마저도 여러 번 읽어야 이해가 될 때가 많다. MTPE로 작업하기에는 문장이 어색한 부분이 꽤 많은데도 단가를 낮추려고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되는 작업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래서 늘 50%밖에 되지 않는 단가가 불만이었다.


     영어와 뿌리가 같은 게르만어를 번역하는 번역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는 영어와 언어의 체계가 많이 달라서 어쨌든 사람 손을 거쳐야 매끄러운 문장이 나온다. 그래서 구글 번역기나 파파고도 내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챗GPT라는 엄청난 툴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툴이 곧 인간의 직업을 모두 대체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했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준다기에 혹시 번역 실력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금 작업 중인 소설 번역에 활용해 보기로 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리 일자리를 잃게 되려나 싶어 약간 쫄았다.


     결과적으로 챗GPT는 구글 번역기보다는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하는 듯 보였다. 이보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틀린 문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챗GPT에게 세상에 없는 책 이름을 대고 내용을 알려달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꾸며낸 내용을 읊는 것과 비슷하다. 이 기능 때문에 나는 오히려 챗GPT를 사용할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구글이나 파파고 번역기는 쉼표나 콜론, 세미콜론, 수식어 절이나 구가 많이 포함된 문장에서 어김없이 오류가 나는데, 챗GPT는 앞뒤 문장의 맥락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윤문을 해버려서 문장 의미가 달라질 때가 많았다. 유료 버전 챗GPT는 성능이 더 뛰어난지도 모르겠지만 비슷한 알고리즘으로 운영된다면 한국어 번역 결과물이 혁신적으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일거리가 있겠다 싶어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여전히 문득문득 곧 일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마 번역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직군에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걱정거리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창작물은 못 건드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요즘은 AI가 웹툰도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 일은 AI한테 시키고 인간은 놀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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