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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숙희 Oct 11. 2023

원고를 넘긴다고 끝이 아니다

자책의 늪

     최종 원고를 넘기고 작품 내용을 잊을락말락할 쯤이면 역자교정 요청이 들어온다. 편집자 수정을 거친 원고를 번역가가 한 번 더 확인하는 과정인데, 독자가 이해하지 힘들 것 같은 문장이나 번역이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원고에 메모가 달려 오기도 한다. 베테랑 번역가들은 다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나는 역자 교정 원고 파일을 열 때면 매번 긴장하곤 한다. 학창 시절 시험 성적표를 볼 때처럼 말이다.


     작업할 때부터 까다롭다고 느껴지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나한테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 내용이라 가볍게 넘어갔던 문장이 편집자에게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원서를 이해할 수 있는가와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번역할 수 있는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아카데미에서는 기준을 중학생 독자로 두라고 조언하는데 까마득한 나의 중학생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데다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모두 중학생 수준에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도 마음 편하게 최종원고를 넘길 수 없다.


     이번에 역자문의가 들어온 작품은 주식 관련 작품이었는데, 미국 주식 시장과 한국 주식 시장이 완전히 같지 않아서 각종 전문 용어 선택부터 쉽지가 않았다. 이렇게 전문성이 있는 작품은 기본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번역할 수 있어서 자료조사에 시간이 꽤 든다. 그러니 출판사들이 전공자를 선호하는 게 백번 이해가 간다. 영문학과나 국어국문학과, 통번역과 출신이 아닌데 번역을 할 수 있겠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나는 늘 영문학과가 아닌 게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다고 답한다. 경험으로 미뤄볼 때 프리랜서 번역가들이 맡을 가능성이 높은 분야를 따져보자면 순수문학보다 장르문학, 장르문학보다는 실용서인 듯하다. 적당히 희귀한 분야에 전문성이 있을 수록 작품을 받기가 유리하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은 대학에서 주식과 재무 관련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내게는 생소하지 않았지만, 이해한 내용을 원문에 맞춰 한국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쉽지많은 않았다. 게다가 삽입한 자료에 대한 설명에 미흡한 부분이 더러 있어서 이러한 부분을 말이 되게끔 한국어로 옮기는 데도 애를 먹었다. 결국 내가 미숙한 탓인데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 같다고? 맞다. 내가 작업한 원고에 수정할 거리가 있었다는 게 창피해서 하는 구차한 변명이다. 역자교정을 할 때면 이런 변명을 언제쯤 멈출 수 있을런지, 손댈 곳 없이 완벽한 원고를 넘기는 날이 과연 올 것인지 고민하며 자책하곤 한다.


     연휴가 끝나고 누덕누덕 기운 교정원고를 에이전시에 보냈다. 마냥 후련하지만은 않지만 작업 중인 작품이 있으니 얼른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번 작품도 만만치가 않다.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느낌이니 원, 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그래서 매번 '이 작품만 끝나면 이 길이 나한테 맞는지 고민해야지' 생각하곤 하는데 이것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 아직까지는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프리랜서가, 혹은 직장인이 하는 고민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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