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사는 동안 죽음이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느 날 느낌이 이상해 돌아보니 슬그머니 뒤를 따라다니는 죽음을 알아차린 주인공 오리처럼.
그러나 오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죽음은 '만일을 대비해서' 항상 쭉 오리 곁에 있었다. 우리도 오리처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은 삶 속에 친구처럼, 그림자처럼, 우리 곁에 따라다니고 있었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밖이 있으면 안이 있으며,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듯이 삶과 죽음은 쌍둥이처럼 함께 한다. 항상.
죽음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와 우리를 맞이하므로 삶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꽤 괜찮은 친구'일 수도 있다. 죽음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삶 속에 함께 할 수 있다면 삶이라는 것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훌륭한 친구이다. 연못에서 자맥질 후 축축하게 젖은 죽음을 안아 따뜻하게 해주는 오리처럼 우리는 죽음을 포옹하고 친구로 맞이하여 그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아무도 죽음에게 그런 대접을 해주지 않은 것은 죽음이 나쁜 것이고, 끝이며, 존재해서는 안 될 금기시의 대상으로 여기는 고정관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친절과 자비를 베푼다면 삶을 더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매 순간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다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지금 이 순간 아직 죽음이 우리의 좋은 친구로 남아 삶과 함께 우리 곁에 있을 때, 우리는 매 순간 감사하며 삶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거나 하품을 하며 늦잠을 잘 수도 있다. 언젠가 죽음이 삶을 대신한다는 것을 알기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살아있음의 특권과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살아서 만나는 인연들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 수 있다. 그들이 따뜻해지도록 꼭 안아줄 수도 있고 함께 손을 잡아 체온을 나눌 수도 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오리가 고요하고 쓸쓸한 연못을 보며 자신이 죽으면 연못 혼자 외로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자 죽음은 말한다.
"네가 죽으면 연못도 없어져. 적어도 너에게는 그래."
오리가 죽으면 오리의 연못도 없어진다. 오리의 연못은 오리의 세계에만 있는 연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죽고 나면 내가 살던 세계가 나만 없어진 채 그대로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내가 살던 나의 세계도 함께 사라진다. 나의 세계는 내가 창조한 세계이고, 유일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이므로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이 있다. 이 세계를 사랑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따뜻한 세계로 만들지 미움과 추함만 있는 차가운 세계로 만들지 그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사라지는 이 세계가 지금 어떤 세계인지 나무 위에 올라가 아래를 보듯 가만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당연하게 쉬어지는 숨이 멈추고 아주 조용히 누워 강을 건너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죽음의 배웅을 맞이하며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죽음의 세계가 어떠한지는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다. 그곳에서는 삶이라는 친구가 가만히 우리를 따라다니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삶이 슬픈 것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떠내려가는 오리를 바라보며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죽음은 삶이다. 삶은 죽음이다. 둘은 하나이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서서 그 둘 모두를 좋은 친구로 삼아 따뜻한 세계를 만든다면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문득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 둘을 모두 살고 있다. 그것이 곧 삶이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