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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11. 2023

올레 20코스, 내 호흡을 찾아가는 순례길

해녀박물관, 세화오일장, 달책빵, 행원포구와 해녀할머님들

2023년 1월 5일 목요일

* 성산읍 최저기온 4도, 최고기온 12도

* 8시 30분 숙소 출발, 6시 숙소귀가

* 28,210보

* 20.36km 걸음

* 올레 20코스, 해녀박물관, 세화5일장, 달책빵

* 점심 : 평대전복 - 전복돌솥밥(15000원)  


오늘의 걷기 코스는 올레길 20코스이다. 올레길 공식 홈페이지 소개에 의하면 20코스는 '제주 북동부 바다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담은 바당올레이고, 김녕서포구에서부터 김녕, 월정, 세화 해수욕장의 잔잔하게 일렁이는 쪽빛 바다 물결을 감상하며 걷는 길'이다. 원래 20코스의 출발점은 김녕 서포구이고 도착점은 제주 해녀박물관이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해녀박물관에서 출발해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마지막 지점 근처에 있는 세화오일장을 들르기 위해서다. 세화오일장은 5,10,15,20,25일에 서는 장인데 점심시간이 끝나면 파장 분위기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 제주해녀박물관,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쓰다

숙소 앞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제주해녀박물관부터 찾았다. 이 박물관은 제주 해녀의 삶, 일, 바다를 주제로 꾸며진 곳이다. 제주 해녀는 과거에 제주도 수산 총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가계와 지역 경제의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해녀들은 저승에서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만큼 해녀의 일은 고단하고 위험하며 목숨이 직결된 일이었다. 그녀들은 걸음마를 떼고 말을 배우면 자연스럽게 바다에 나가 수영하는 법부터 배운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딸에서 손녀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그녀들에게 바다는 놀이터이자 일터이고 조상이자 친구였다. 억척스럽게 거친 바다에 순응해 삶을 개척하며 생활을 꾸려나갔던 그녀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 세화오일장, 아주 잠시 제주도민이 되어보는 시간

박물관을 40분 정도 관람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두 번째 경유지는 세화오일장이다. 나는 시장을 좋아한다. 무언가를 사는 것이 아니더라도 시장에 가서 상인들과 사람들이 흥정을 벌이고, 거래를 하며,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생활의 편리를 도와주는 여러가지 물건들과 의식주에 필수적인 먹을 것과 입을 것, 쓰는 것들을 구경하며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구나. 서로 도우며 무언가를 만들며 팔고 사며, 돈과 경제를 순환시키며 부지런히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경외감과 겸손함을 느낀다. 마트에는 그 모든 과정들이 생략된 채 차가운 물건들만이 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교류 대신 거대한 물건들의 파도 사이를 헤엄치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떠밀려 다닌다. 

세화 민속오일장에는 모종, 꽃화분, 옷, 모자, 신발, 갖가지 제주산 식재료들과 반찬, 제철 수산물, 붕어빵, 떡볶이, 국밥, 호떡 제철과일, 가구까지 없는 것이 없지만 크지는 않은 아담한 시장이었다. 예쁘게 차려입으시고 모자를 고르시는 할머니들 틈에 끼어 나도 이 모자 저 모자를 써보고, 청과물 주인 아저씨가 시식으로 건네주신 레드향도 까먹고, 맛있게 구워진 호떡과 군밤 앞에서 군침을 삼키며 돌아다녔다. 관광객보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장이라 그런지 왠지 나도 잠시나마 제주도에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오일장에는 매일 오고 싶다.



# 평대전복, 나의 제주 소울 푸드

세화 오일장을 나와 뱅듸길을 거쳐 평대로 넘어왔다. 11시 즈음 이곳 평대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한다. 원래 가고 싶었던 식당은 '밥짓는 시간'이라는 곳이었으나 영업이 12시부터 시작이라 '평대 전복' 이라는 전복 전문 식당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내가 첫 손님이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전복 돌솥밥을 주문했다. 제주 첫 올레 여행에서 우연히 전복 돌솥밥을 먹고 그 맛에 반해 제주에 올 때마다 한끼는 꼭 이것을 먹을 정도로 나는 이 음식을 좋아한다.

반찬은 총 6개가 나왔다. 오징어 젓갈, 미역무침, 마늘 장아찌, 멸치볶음, 고사리와 시금치나물, 그리고 가장 맛있었던 미니열무김치. 솥에 가지런히 누워 몸을 데우고 있는 전복과 밥을 옮겨 닮고 따뜻한 물을 솥에 부었다. 치-이이이이-익. 밥에는 콩류들이 다양하게 들어있어 고소한 맛이 입안을 감쌌다. 양념 간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으니 전복 특유의 향과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 처진다. 반찬도 맛있다. 역시 전복 돌솥은 실패가 거의 없다. 마지막 숭늉까지 깨끗이 비우고, 사장님이 주신 당근쥬스도 클리어하고, 기분좋게 식당을 나왔다. 



# 달책빵,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기

평대리 해수욕장에서 비취색 아름다운 바다와 하얀 모래를 감상하며 바다멍을 했다. 쉬다 걷다 쉬다 걷다를 하며 슬렁슬렁 제주 올레길을 걷다가 평소 안 해보던 짓을 해보기로 했다. '달책빵'이라는 서점 겸 카페를 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커피를 조금만 마셔도 잠이 전혀 오지 않는 어린이 입맛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여행 중에 카페를 가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내가 '달책빵'이란 곳을 찾아간 이유는 독립서점에서 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것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커피는 못하지만 책은 좋아하는 나는 제주 독립서점에는 어떤 책들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달책빵에 들어선 순간 특유의 한적하고 여유로우며 따뜻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이곳은 ㄷ자 구조로 되어 있어 왼쪽은 카페, 오른쪽은 서점, 그리고 가운데는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한라봉 에이드와 파운드케이크를 주문하고 오른편의 독립서점의 서가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책의 양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키워드별로 추천 책이 포장지에 싸인 시크릿북도 있고, 그림책과 잡지도 소량 있었다. 여러 책들 중 <초록이 땡긴다>라는 책에 관심이 가서 인터넷으로 내용을 찾아봤다. 숲과 나무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책이었다. 그 밖에도 흥미로워 보이는 책들이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주문한 한라봉 에이드와 파운드케이크를 먹으며 햇볕 멍 때리기를 하며 글을 썼다. 오늘은 구름이 적당히 끼어서 걷기에도 일광욕하며 앉아 빈둥거리기에도 모두 좋은 날이다. 여행은 날씨가 반인데 오늘은 최고의 날씨다. 






카페에 앉아 놀멍 쉬멍 일광욕을 하고 있으니 왜 사람들이 카페라는 곳을 애용하는지 알 것 같다.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은 일상의 시간인 동시에 비일상적인 특별한 시간이다. 카페라는 공간은 사실 커피 같은 음료,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먹기 위한 곳이다. 또는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회적인 교류 공간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런 실용적인 목적을 제외하고 카페에는 다른 역할이 하나 더 있다. 그저 앉아서 마시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간. 사람들은 카페에서 일상의 의무나 잡다한 일들을 모두 잠시 내려놓고 비일상의 시간을 보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마음 놓고 멍 때리는 시간, 의도적으로 비움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래서 카페라는 공간은 쉼의 공간으로 변화한다. 제주도의 유명한 카페들은 모두 예쁜 창과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아무것도 없는 벽으로 막힌 카페보다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미적 사치를 누리는 멍때리기가 더 재미있기 때문이리라. 나도 가끔은 커피를 마시지 않더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카페를 찾아야겠다. 



# 걷는 시간은 내 호흡을 찾아가는 시간

달책빵에서의 달콤한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제주 20코스는 마을 돌담길과 풍력발전기, 그리고 비취색의 아름다운 바닷길을 왔다 갔다 하며 걷는 길이다. 중간중간에 박노해의 <걷는 독서>에서 발췌한 걷기와 관련된 문장들이 표지판으로 세워져 눈길을 끌었다.


마음아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 박노해 <걷는 독서>


나에게 걷는 시간은 나의 호흡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의 호흡과 세상의 빠른 호흡에 휩쓸려 잊어버린 나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찾아가는 시간. 길을 나 홀로 걷다 보면 세상에는 걷기와 나, 그리고 호흡만이 남는다. 의식하지 않고 그냥 했던 숨쉬기에 집중하게 된다. '아, 내가 이렇게 호흡하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사느라 잊고 있었던 나에게 편한 호흡의 길이와 깊이를 찾아가게 된다. '그래, 나에게 이 정도 깊이의 호흡이 좋아. 이게 나의 호흡이야.'


호흡은 영혼과도 같은 존재다. 나를 살리게 하고, 내가 나의 길을 잃지 않고 행복하게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친구다. 나의 호흡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오직 나만이 나의 숨을 쉴 수 있고, 나만이 나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호흡은 마음이 만든다. 마음이 이리저리 휩쓸려 제 방향을 찾지 못하면 호흡도 뒤죽박죽이 된다. 거칠어졌다 세차 졌다 맥이 풀렸다 요동친다. 사실 호흡이 마음 따라 요동치는 현상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나 바깥의 일에 매몰되어 내 안의 일, 호흡을 잊고 사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걷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내 호흡을 찾기 위해서, 마음과 영혼을 돌보고 그들이 제 갈 길을 갈 수 있도록. 너무 빨리 걸으면 쉬이 지치고, 마음을 잃어버린 채 걸으면 영혼이 사라진다. 천천히 걸어야 오래 걸을 수 있고 영혼과 함께 걸을 수 있다. 내 호흡을 잊어버리지 않고 찾기 위해 나는 걷는다.




# 행원포구의 1인용 의자와 해녀 할머니들

조금씩 나의 호흡을 찾아가며 이른 곳은 행원포구다. 제주에 올 때마다 올레길 하나는 반드시 걷는 걷기 애정러인 나에게 올레길을 지치지 않고 즐겁게 걷는 몇 가지 노하우가 생겼다. 처음 올레길을 걸었을 때는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에 감탄하느라 나의 상태와 체력은 무시하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걷기만 하다 보면 쉽게 지친다. 그래서 오래 걷기 힘들다. 올레길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즐기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이것'을 잘 찾아야 한다. 이것은 바로 나만의 전용 쉼 의자이다. 되도록이면 멋진 바다와 풍경을 보며 쉴 수 있는 벤치나 의자가 최고다. 하지만 앉을 수 있다면, 따뜻한 햇살을 쬐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그 쉼 의자에서 내가 할 일은 지금까지 나를 저곳에서 이곳으로 불평불만 하지 않고 모셔다 주는 고마운 다리를 쉬게 해주는 것이다. 앉아서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결을 느끼고, 따뜻하게 등을 어루만지는 햇볕을 느끼며 기지개도 편다. 신발을 벗어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발목도 휙휙 돌려주고, 종아리도 주물러 준다. 그리고 깊이 호흡한다. 그 순간 들리는 소리, 보이는 풍경은 아마 인생길 내내 나의 영혼의 쉼터가 되어줄 것이다. 






행원포구에서도 나는 내 영혼의 쉼터가 되어줄 소중한 1인용 의자를 발견했다. 털썩 주저앉아 바닷바람을 쐬고 있자니 물질하고 돌아오는 해녀 할머님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이 추운 겨울날에도 바다에 다녀오신 할머니들의 볼이 빨갛다. 머리칼은 바닷물에 젖어 더 꼬불거리며 이미 잠수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환복한 할머님은 기다리는 봉고차를 찾아 분주하시다. 

그때 한 할머니가 오토바이를 타고 미끄러지듯 유유히 눈앞을 지나간다. 카키색 누빔에 허리 스트링이 조여진 재킷을 걸치시고, 화려한 자줏빛 꽃무늬 고쟁이 배기 바지에 파일럿 같은 털모자를 눌러쓰신 멋쟁이 할머니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가시는 장면이다. 패션이 참 힙하시다.

제주 할머님들은 멋지다. 오토바이도 멋지게 타시고 마을을 이리저리 종횡무진하신다. 밭으로 바다로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며 유유히 오토바이를 모시는 할머님들. 그녀들이 멋져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평생을 이곳 제주에서 뿌리내리고 살며 바다를 터전 삼아 생계를 일구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세월이 태도에 묻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힙한 패션도 따라갈 수 없는 아우라. 나도 제주 할머님들처럼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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