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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16. 2023

제주 책방 순례에서 찾은 나의 인생 키워드

<라스트 홀리데이>와 <지금 해보기의 기술>

2023년 1월 9일 월요일


* 12,537보

* 8.94km 걸음

* 고성오일장 - 성산일출봉 - 종달리 - 순희밥상 - 책약방 - 소심한 책방 - 종달리 746

* 점심 : 종달리 순희밥상 (고등어조림)


# 고성오일장에서 노지감귤을 획득하였습니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고성오일장이다. 나는 제주에 묵는 7일 동안 제주 동남쪽에 있는 성산읍 고성리의 한 호텔에 있었다. 고성오일장은 내가 묵은 호텔 바로 앞에 있었고 4,9로 끝나는 일마다 서는 민속오일장이다. 그래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머무는 호텔 객실은 9층이다. 내 방에서 통창으로 바깥을 보면 항상 보이는 것이 고성오일장이었다. 그동안은 장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닫힌 시장 건물만이 서있었다.

오늘도 아침형 인간인 나는 새벽 4시쯤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리고 커튼을 열어 바깥을 보니 상인들이 벌써부터 개장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직 해도 뜨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과일 좌판을 열어 귤, 사과, 한라봉, 토마토, 샤인머스켓 등을 정리하시고 모종 판매상인은 씨앗과 화분들을 가지런히 배치하고 계셨다. 봉고차며 택시며 계속 차가 들어와 물건들을 나르기도 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나르고 좌판을 배치하시며 개장을 준비하는 일들은 4시를 지나 8시가 넘어서까지 이루어졌다.

' 참으로 일찍부터 준비를 하시는 거구나. 대단하시다. '

나도 얼른 가서 시장을 돌며 물건들을 구경하고 한아름 사고 싶은 마음에 설레었다.


시장에 가니 부지런한 분들은 벌써 두 손 가득 여러 가지 것들을 사서 돌아가시고 누군가는 나처럼 9시가 되어서야 시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나의 목표물은 맛있는 귤이다. 과일 킬러인 나는 매일 아침마다 과일로 식사를 한다. 제주에 왔으니 신선한 노지감귤을 먹고 싶었다. 대부분 박스채 많은 양을 파는 곳이 많아 뚜벅이 여행자인 나는 사지 못했다. 오늘 기필코 사고 말리다! 다짐하며 시장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붕어빵, 어묵, 농기구, 나물, 감자, 고구마, 모자, 신발, 옷. 온갖 것들을 구경하다 어느 과일 좌판이 발이 딱 멈추었다.

"노지 감귤 2kg 5천 원"

그리고 그 뒤에 수북이 쌓인 못난이 노지감귤들. 침이 입안에 고이며 꼴깍하고 넘어갔다. 육지에서는 거의 광나고 반짝거리는 평범한 귤만 먹었는데 이런 얼룩덜룩 못생긴 노지감귤을 영접하다니! 오른쪽에는 한라봉도 있었다. 역시 5천 원. 나는 성격 좋아 보이시는 주인아주머니께 물었다

"어떤 게 더 맛있어요?"

"노지감귤이 더 맛있어. 한라봉은 지금은 아직 셔."

맛보라며 노지감귤 하나 건네주시기에 그 자리에서 껍질을 까 입안에 홀랑 집어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제주 감귤의 향기란! 제주의 바람, 햇볕, 물을 품고 자란 노지감귤은 황홀할 정도로 맛있었다.

나는 과일가게 주인분인 김금녀 씨에게 신협으로 계좌이체를 해 드리고 만족스럽게 귤이 가득한 봉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여행 중에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담아주셔서 일단 호텔로 돌아와 테이블에 놓고 몇 개를 더 까먹었다. 역시 귤은 노지 감귤이다. 껍질이 얇고 당도는 진하며, 농축된 과즙을 자랑하는 노지감귤의 맛은 껍질도 두껍고 맛은 밍밍하며 광택 만나는 이쁜이 귤의 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침귤로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짐을 챙겨 성산일출봉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제 우도에서 하루종일 패딩을 벗고 다녔는데 오늘 기온은 어제보다 더 높은 듯하여 과감히 패딩은 벗고 얇은 티 하나에 남방 하나만 걸치고 나왔다. 추위에 약한 나의 겨울 로망은 치앙마이나 발리처럼 따뜻한 나라를 이런 차림으로 가볍게 걸어 다니는 것이었는데 제주에서 이렇게 소원성취를 한다.



# 언제 와도 좋은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 매표소에 가서 정상으로 오르는 입장료 5천 원을 내고 길을 시작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올라가는 길이 정비되지 않은 편이어서 꽤 스펙터클했었는데 지금은 모든 길이 계단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뭔가 예전이 더 스릴 넘치고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성산일출봉의 정상은 여전했다. 신비롭고 눈부시며 아름답다. 앞쪽으로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신비한 구덩이가 있고 뒤쪽으로는 우도와 성산항, 성산읍 마을과 밭의 곡선들, 배와 사람들이 조그맣게 보인다. 처음 성산일출봉을 올랐을 때는 일출시간이었기에 그 신비로움이 배가 되었다. 온갖 색이 다 있는듯한 하늘과 구름, 그리고 성산봉의 곡선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마치 탄생신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세월은 흘러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성산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 누워 바람을 맞고 파도를 안으며 서 있다. 그 한결같음이 나에게 묘한 포근함과 안심,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애틋함을 주었다. 그래서 성산은 언제 와도 좋다.




# 제주 종달리 책방 순례


성산일출봉을 내려와 저 멀리 우도까지 구경하고 종달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종달리는 올레길 코스에 있어 자주 걸었던 마을이다. 그러나 오늘의 목적은 올레길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다. 바로 제주 책방 순례. 책과 책방을 좋아하는 나에게 제주 책방은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한 곳이다. 요즘 많은 책방들이 제주에 생겨나고 있는데 마침 종달리에도 갈만한 책방이 많아 그곳들을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 제주 종달리 혼밥, 순희밥상


책방 순례를 돌기 전 우선 배를 채우기로 했다. 종달리에서 혼밥 할 수 있는 식당을 찾다가 예전에 올레길을 돌다 마주친 적이 있는 '순희밥상'이란 식당을 가기로 했다. 올레길을 돌 때도 너무 정겹고 예뻐 보여 궁금했던 식당이다. 드르륵 문을 열고 식당 안에 들어서니 이미 2팀이 식사를 하고 있고 주인분은 바쁘게 음식을 하고 계셨다. 가게가 좁은 편이라 테이블은 3개가 다였고 안채 쪽은 주인분의 살림집인 듯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주인 분께 한 명 식사도 가능하냐 여쭈고 '고등어조림 정식'을 주문했다. 가끔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시던 묵은지에 무를 넣고 끓인 고등어조림이 먹고 싶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이 조금 큰 테이블이어서 뒤에 들어오신 손님 2분이 합석하게 되었다. 조금 뻘쭘했지만 각자 열심히 핸드폰을 하며 어색함을 지우고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나온 고등어조림. 가시를 잘 발라내고 하얀 속살을 분리해 밥과 함께 입으로 넣었다. 너무 짜지 않고 적당히 간이 베어 고등어 살의 맛이 느껴지면서 김치의 시원한 맛이 고소함을 감싼다. 아래 깔린 무도 사강사강 짭조름한 것이 흰 밥과 찰떡궁합이다. 옆자리의 2인 이상만 주문가능한 순희정식은 똑같은 반찬에 고등어조림 대신 생선구이가 나오는 듯했다. 정식이 궁금했는데 고등어조림을 못 먹었으면 후회했을 것 같다.

TV도 없고 오래된 안테나 달린 라디오만 흐르는 식당 안에서 손님들은 말없이 부지런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하루의 에너지를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먹는 것이 결국 나다'라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먹는 행위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우리 몸은 무언가를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 내가 먹은 이 음식이 결국 나의 살과 뼈, 근육과 에너지를 만들고, 여행 중에 먹는 한 끼는 걷는 내내 소중한 동력이 되어 준다. 그리고 때로 음식은 여행을 강력하게 기억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그때 먹었던 음식이 여행의 전부를 이루기도 한다.

'아, 그때 거기서 고등어조림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감동했지!' 같은.



육고기를 안 먹고 먹는 것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나조차도 여행지의 음식은 여행을 기억하는 강력한 추억이 되어 기억의 서랍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여행지에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오감은 레이더를 바짝 세운다. 후각, 청각, 미각 모두 예민해진다. 그래서 여행지에서 먹는 맛있는 음식은 평소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고 강렬하게 기억된다.

몸으로 기억하는 경험은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새로운 어린아이처럼 감각이 살아나고 몸으로 경험하며 세포가 깨어나는 그 느낌이 좋다. 어딘가 멀리, 외국으로 떠나지 않아도 그러한 세포의 깨어남, 몸으로 경험하는 태도, 감각이 살아나는 경험을 만들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여행지가 될 것이다.

2023년에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로 일상을 여행하듯 살고 싶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줄 알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도전하고 싶다.




# 책약방으로 제주 책방 순례 스타트!


맛있는 고등어조림으로 에너지를 채우고 책방순례를 시작했다. 첫 번째 책방은 책약방. 이곳은 무인서점으로 매우 자그마한 곳이었다. 여행자 2명이 책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꽉 차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협소했지만 한편에는 CD도 있고, 다양한 책소개와 제주 책방 지도도 비치되어 있었다.



# 소심한 책방 - 소심한 마음과 소확행


두 번째 책방은 소심한 책방. 이곳은 규모도 꽤 크고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특히 에디터들의 소개와 설명이 곳곳에 붙어 있어 새로운 책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키워드와 상황에 어울리는 추천책이 봉투에 담긴 시크릿북도 많았는데 거의 이 책방의 판매순위 1위부터 10위까지를 모두 시크릿북들이 담당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는 창의성과 관련된 11번 시크릿 북을 읽고 싶었지만 품절 중이라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내가 책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책을 구매해 갔다. 가족, 연인, 부부 등.

소심한 책방은 이름처럼 소심한 마음이 드는 책방이다. 소심한 마음이란 작은 것에도 마음을 쓸 줄 아는 마음을 말한다. 삶의 행복은 대범한 마음이 아닌 소심한 마음으로 살 때 더 잘 느껴지는 법이다. '뭘 이런 걸 다...' 하고 지나쳐버릴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도 소중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야말로 인생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놓치지 않는 태도이다. 곳곳에 흩어진 작은 책보물 들을 기웃거리며 나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점 안에 흐르는 음악 선곡이 너무 좋아 주인분께 어떤 음악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소심한 마음에 물어보지는 못했다.




# 종달리 746 -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


소심한 책방을 뒤로하고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종달리 746'. 이것은 서점이라기보다 북카페 같은 곳이다. 음료를 주문하고 카페에 비치된 책들 중 보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읽으면 된다. 구입도 할 수 있다. 소심한 책방처럼 신간이나 다양한 책들이 있는 책방은 아니지만 주인분이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코너, 만화책 코너, 어린이 책 코너, 특정 작가의 코너 등 다양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1인용 창가 테이블에는 방명록과 함께 버킷리스트를 쓸 수 있는 코너가 있었다. 그곳에는 주인분이 어떻게 이 책방을 열게 되셨는지 소개하는 짤막한 글이 붙어있었다. 제주도에 내려와 가족들과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를 언젠가 이루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행하는 마음으로 이곳을 시작하게 되셨다는 이야기였다.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가 생각났다. 언젠가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적은 버킷리스트 북을 애지중지하며 똑같은 일상을 살던 여주인공이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는 내용의 영화다. 인생을, 오늘 하루를, 지금 이 순간을 내 인생의 마지막 휴가인 것처럼 산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언젠가 할 거야.' 라며 미루기만 하던 버킷리스트를 지금 당장 실행하면 일생이 얼마나 흥미진진해질까? 2023년에는 모든 날을 라스트 홀리데이처럼 보내고 싶다. 언젠가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실행하고 도전하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버킷리스트가 2023년의 성취리스트로 바뀔 수 있도록 도전하자.




#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휴가인 것처럼


'모뉴에트'라는 곳에서 한라산 소주로 만든 까눌레를 사고, 팥쥐팥죽에서 팥죽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깨끗이 샤워하고 TV를 트니 이런 우연이. 마침 TV에서는 <탐나는 제주>라는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코너 이름은 '책 속의 제주'였는데 제주에서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운영자가 나와 매주 책을 소개하는 코너인 듯했다. 오늘의 소개 책은 <일단 해보기의 기술>. 오늘 나의 여행 주제에 딱 맞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신의 계시인가. 가끔 삶에는 이런 우연 같은 일들이 절묘하게 일어나곤 한다. 마치 누군가가 치밀하게 짜놓은 소설 속의 한 장면 같은 기분이다.

TV에서 소개하는 책의 내용은 너무나 나의 오늘 마음과 다짐을 반영하는 책이었다. 2023년 나의 시작은 이 책과 함께 해야겠다. 올해 나의 키워드는  '라스트 홀리데이' 그리고 원워드는 '일단 해보기'로 정했다. 언젠가 할 거야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해보자.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 휴가인 것처럼 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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