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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17. 2023

지금 걷는 이 길 사이사이의 반짝거리는 순간들

제주 광치기 해변과 빛의 벙커

2023년 1월 10일 화요일


* 20,986보

* 15.31km 걸음

* 광치기 해변 - 빛의 벙커 - 올레 2코스(수산봉)



# 여행의 마지막 날, 광치기 해변 아침산책


오늘은 제주 걷기 여행의 마지막날이다. 첫 목적지는 광치기 해변. 이른 아침에 산책지로 선택한 광치기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가끔 말을 타고 해변을 달리는 사람과 관광객 한 두 명이 뜨문뜨문 있을 뿐. 한적한 겨울 아침 바다를 오롯이 마주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어제 올랐던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보였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해가 내리쬐는 해변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목적 없이 광치기 해변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영상을 찍거나 사진을 찍으며 한가롭게 산책했다. 굳이 어떤 목표를 세우지 않고 발길 가는 대로 걷는 것이 기분 좋았다.


바다는 언제 봐도 좋다. 숲은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어준다면 바다는 사람을 희망적으로 만든다. 떠오르는 태양을 파도치는 바다와 함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낙관적인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침 바다는 그런 힘이 있다. 광치기 해변에서 희망의 기운을 담뿍 얻고 다음 목적지인 '빛의 벙커'로 향했다.



# 빛의 벙커


빛의 벙커는 옛 국가기관 통신시설이었던 벙커를 몰입형 예술 전시관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고흐, 클림트, 모네 등 거장들의 작품들을 어둠 속 공간에서 프로젝터 이미지로 재탄생된 전시를 음악과 함께 체험하는 전시다. 2022년 11월부터 2023년 10월까지 약 1년 동안은 세잔과 칸딘스키를 주인공으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약 15분을 걸어가니 비밀요새처럼 신비스러운 벙커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주항공 항공권을 제시하여 10% 할인을 받았다. 락커가 있어 짐과 옷을 보관하고 전시관으로 입장했다.


첫 번째 룸쇼는 <세잔, 프로방스의 빛>으로 세잔이 1861년 파리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시기부터 후기까지 그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사과 그림은 탁자 위의 사과들이 마치 쏟아질 듯 그려져 있다. 과거 전통회화의 정물화에서 대상을 사실과 똑같이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고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듯 과감한 표현이다. 지금 사람들이야 이런 그림이 파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과거 전통회화의 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이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을 사진처럼 정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원근법 등을 모두 무시하고 화가의 주관과 개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그리는 방법. 예술은 끊임없이 과거의 것을 부수고 새롭게 나아가는 시도들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룸쇼는 <칸딘스키, 추상회화의 오디세이>라는 전시로 칸딘스키가 개척한 추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에게 음악은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데이비드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가 흐르며 칸딘스키의 작품이 해체되어 디지털 이미지로 영사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이 둘이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음악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면 이미지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넋을 잃고 음악과 영상에 빠져 전시를 관람했다. 평면적인 액자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음악이 흐르고 이미지가 움직이는 영상 사이를 거닐며 예술작품들을 보는 것은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 걷기와 걷기 사이 무음의 시간


그러나 나는 예술보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경과 소리가 더 좋다. 아무리 창의적이고 아름답게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창작해도 자연의 무질서와 질서가 혼합된 그 광대함과 오묘함, 순수하면서 혼란스러운 자연스러운 풍경을 따라갈 수 없다. 그것은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리도 그렇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자연에 흐르는 바람소리, 파도소리,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가지가 부딪치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며 얼음이 녹는 소리들을 따라갈 수 없다. 자연이 내는 소리들은 그 자체로 완벽하며 공과 무음이 철저하게 함께 하기에 듣는 이에게 평화를 준다. 자연은 명상과 사유의 공간을 소리와 함께 빌려준다. 우리는 자연의 소리 속에 숨어 있는 빈 악보, 공의 공간, 무음의 시간 속에 머물며 지금 이 순간에 흐르게 된다. 앞으로만 내달리던 숨을 고르고, 과거나 미래로 도망가던 생각의 흐름을 멈춰서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 쉼의 시간을 자연은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이번 제주 걷기 여행은 사실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와 걷기 사이의  무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떠난 것인지 모르겠다. 무음의 시간이란 쉼의 시간, 멈춤의 시간, 공의 시간, 비움의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시간이다. 걷는 중간중간 제주 현무암 담에 앉아 햇빛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올레길 바닷가 의자에 앉아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듣고, 오름 오르는 길 벤치에 앉아 나뭇잎들이 바람에 사락사락 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람의 소리에 놀라 뛰어 달아나는 노루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우도로 출발하는 배가 엔진을 돌리며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를 듣고, 갑판에 서서 갈매기들이 끼륵거리며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 오일장 시장 상인들의 활기찬 소리를 듣고, 무인서점 창가에 앉아 창가유리에 바람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양철지붕 위에 늘어지게 앉아 일광욕하는 고양이들의 하품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나에게 비움의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시간은 완벽한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 지금 걷는 이 길 사이사이의 반짝거리는 순간들


이제 내일 9시 50분이면 나는 제주에서 서울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 것이다. 일주일 전 서울에서 제주로 오는 비행기 안의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있을 것이다.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하며 서두르던 내가 아니라 비어있는 공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즐거움, 여백의 시간을 누릴 줄 아는 내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인생도 여행도 어딘가 저 멀리 있는 보이지 않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내달리는 경주가 아니다. 인생의 즐거움, 여행의 재미는 지금 걷고 있는 그 길 여기저기, 그리고 사이사이에 흩뿌려져 있다. 그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찾기 위해 나는 이번 제주 걷기 여행을 떠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인생 그리고 여행이라는 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면 좋을지. 저 높은 우주 어딘가에서 보면 나라는 존재는 저 땅 위의 작은 개미보다 더 작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타인의 욕망, 사회의 시선이나 기준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들을 음미하며 여행하면 된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것들이 가득한 크고 넓지만 한없이 작은 이 우주를 헤엄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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