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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06. 2024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에 경건하게 나를 바치는 여행

올레6코스 (정방폭포-소라의 성-북카페 가까이)

2024년 1월 5일 금요일  


어제 서귀포 홈플러스에서 장 봐온 건강한 음식들로 저녁을 먹고 잤더니 역시 몸이 개운하다. 낫또, 김, 현미햇반, 파프리카, 쌈채소, 연두부 등, 조리 없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로만 사 왔는데 역시 고심해서 장 봐온 보람이 있다. 자연식물식과 고기 없는 식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는 심심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조미료 없이 담백한 음식이 가장 맛있다.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맛있어서 먹는다. 그래서 몸이 건강해지니 더 좋다. 아침식사로 샛노란 파프리카를 생으로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체크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올레 6코스다. 이곳은 아주 예전에 한번 걸었었던 길이다. 쇠소깍다리부터 제주올레여행자센터까지 약 10km에 달하는 길이다. 오늘은 이 길을 다시 걸으며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걷기 여행과 더불어 내가 가장 즐기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들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나는 오늘 올레 6코스를 역방향으로 걷기로 한다. 정방폭포에서 시작해 소천지를 거쳐 쇠소깍으로 가는 방향이다. 8시 30분경 아침 제주의 공기는 꽤 쌀쌀하다. 아침 최저 기온이 7도에서 오후 최고 기온이 14도로 기온은 다른 도시에 비해 높은데 쌀쌀하다. 그 이유는 내가 추위에 약한 것도 있고 바람이 센 곳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항상 제주를 찾을 때 두꺼운 아웃도어 패딩 잠바를 입는다. 경기도나 윗 지방들은 아무리 아웃도어 패딩 잠바를 입어도 시리고 추운 기운이 강해 걷고 나면 지친다. 그러나 제주도는 아무리 쌀쌀하다고 해도 역시 따뜻하다. 걷기 딱 좋은 따뜻한 쌀쌀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여름의 제주보다는 겨울의 제주가 더 걷기 좋다고 생각한다.    


  

정방폭포에 도착하니 아직 9시 전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기다릴까 하다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한다. 예전에 이 길을 걸으며 방문했던 왈종미술관도 지나친다. 언젠가 또다시 올 수 있는 핑계를 남기면 이 길이 더 애틋해진다. 그리고 향한 곳은 바로 소라의 성이다. 걷기 여행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북카페. 또는 독립서점. 또는 그냥 책이 있는 곳. 그곳에서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책을 읽을 때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 제주 동쪽의 올레길들을 걸으며 중간중간 북카페나 독립서점 등을 들렀다가 그 매력이 빠지고 말았다. 구좌의 종달리 746, 소심한 책방, 시간이 머무는 책방 등. 그곳에서 보냈던 꿈같았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책을 보다가 창밖을 보다가 그러다가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한 시간들. 공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충만한 시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시간이었다.     




소라의 성은 야자수 나무들 사이 버려진 방공호처럼 외롭게 서 있는 신비로운 곳이다. 이곳의 용도를 모르고 지나간다면 그냥 쓱 지나가 버릴 만한 아주 작은 북카페이다. 이름처럼 소라의 껍데기를 타고 쑤욱하고 들어가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바닷속 생명체인 마냥 얌전히 떠다닐 수 있는 곳. 그래서 이곳에서는 좀처럼 책을 읽기가 힘들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소라가 되어 바닷속을 부유하는 그 자유로운 느낌이 너무나 황홀하기 때문이다. 햇살에 부서지는 해안절벽과 해수면 위의 반짝임들에 자꾸 눈이 간다. 그리고 한없이 그냥 바라만 보게 된다. 이곳은 책을 읽는 도서관이 아니라 자연과 햇살을 읽고, ‘사색’을 하는 곳이다. 






소라의 성을 빠져나와 다시 길을 걷는다. 아주 천천히 소라의 성에서 가졌던 황홀했던 시간을 음미하며 유유자적 느릿느릿 걷는다. 처음 올레길을 걸을 때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빨리 더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어 속도를 내 걸었다. 그러나 이제는 빨리 걷지 않아도 그것들은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 항상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서두르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내 호흡을 알아차리며 어슬렁어슬렁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걸으면 다리도 아프지 않고 풍경도 소리도 더 잘 감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오롯이 걷기만이 존재하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나도 없고, 오로지 걷는 행위만이 남는 그 시간. 그 시간을 가지려면 아주 천천히 더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야 한다.    


  



그렇게 느릿느릿 걷다 보면 길가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어있는 고양이도 만나고, 풍경 좋은 야외 무료 카페에 앉아 햇살멍도 한다. 마치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딱 하나 ‘걷기’인 사람처럼 그렇게 아주 게으르게 걷는다. 게으르지만 경건하다. 걷기에 대한 나의 애정은 게으르지만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 저절로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며 행복한 얼굴이 된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무한한 기쁨과 행복, 살아있음의 환희를 선물 받기 때문이다. 나의 꿈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것을 게으르게 아주 오랫동안 진심으로 사랑하며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원래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식당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를 반기는 것은 임시휴업을 알리는 종이 한 장. 이럴 땐 가방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가지고 맨손으로 나온 자신이 조금 후회스럽다. 그러나 조금 더 가면 보목포구가 나오고, 그곳에 식당들이 있으니 더 걸어가 보기로 한다. 보목포구에 도착하니 원래 가려고 했던 식당도 휴업 중이다. 결국 그중에 영업 중이던 식당이 있어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원래 보목포구는 자리물회가 유명한 곳인 듯하다. 어민들이 모여 된장에 푼 자리물회를 먹으며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었을 포구를 바라보니 나도 한 사발 들이키고 싶었지만 자리물회는 지금 제철이 아니기 때문에 맛볼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갈칫국이라는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갈치구이나 갈치조림 등은 많이 먹어봤지만 갈칫국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행지에서는 가끔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갈칫국은 기대이상으로 맛있었다. 배추와 당근 그리고 갈치. 단순하고 담백한 비주얼이었지만 맛은 깊어 마치 이제 막 출산한 산모의 몸을 풀어주는 듯 따뜻하고 깊었다. 갈치구이나 갈치조림은 짭짤함과 양념맛이 갈치 본연의 맛을 어느 정도 가리고 말지만 갈칫국은 갈치 본연의 순수한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반찬으로 함께 나온 고등어구이까지 싹싹 깨끗하게 비우고 식당을 나오니 따뜻한 바닷가 햇살이 눈부시다. 배부르고 등따시니 온 세상이 내 것이다.     






느릿느릿 여유롭게 다시 길을 나선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동네주민이 잠깐 산책 나온 듯 어슬렁어슬렁 백수처럼 걷는다. 가방도 없고, 짐도 없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홀가분하다. 주머니 속에는 200ml짜리 조그마한 보온병과 핸드폰이 전부다.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가방 없이 짐 없이 걷는 것이 좋아졌다. 이고 지고 다녀도 결국은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고, 최대한 간소하게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스트의 여행은 미니멀리스트의 일상과 멀지 않다. 생존에 있어 꼭 필요한 것(물, 핸드폰, 카드) 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면 삶에 있어서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가 남는다.

 




  


어슬렁 걷다 보니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북카페 ‘가까이’에 도착했다. 당근주스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가니 바다를 품은 창가 자리에 햇살이 눈부시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의 그림책과 제주 잡지 인을 골라 편해 보이는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의자가 편안해서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누워 책 보기 딱 좋다. 그곳에 앉아 느긋한 시간을 보낸다. 고양이처럼 햇살에 몸을 구우며 달콤한 시간을 즐긴다.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이 아닌 시간에 자신이 매일매일 하는 그것이 진짜 당신이다라는 내용을 어디선가 읽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나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는 답답했다. 매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것인 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에겐 너무나 당연해서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무엇이 나에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의 행복을 가르쳐주는지. 해야 하는 일이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하게 되는 일, 해야지 결심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일, 그런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그 행복을 오래오래 만끽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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