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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08. 2024

삶 전체가 여행이 된다는 것

카멜리아힐/방주교회/정물오름/김정희추사관/대정5일장/모슬포해변/사계해변

2024년 1월 6일 토요일


벌써 제주 보름 살기 넷째 날이다. 보름여행이라고 해도 될 것을 보름 살기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천천히 여유롭게 무리하지 않고 제주를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행이라고 하면 왠지 나도 모르게 무리하게 되고,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것이다.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천천히 여유롭게 여행하는 것이다.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자는 곳을 옮긴다고 해서 나의 뿌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밖으로 넓히는 것이다. 일상을 살 듯 여행할 때는 여행지에서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내가 무언가를 보고 어떤 것을 느끼고 배우며 경험하는지에 집중한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본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것이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직접 밥을 차려 먹는 것도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북카페에 앉아 관심이 가는 책들을 넘겨보는 것도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것이다. 아침 루틴으로 명상하고, 감사일기를 쓰고, 글을 쓰고, 아침 과일을 챙겨 먹고, 요가를 하는 것도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것이다. 과거에 일상 하듯 여행하는 법을 모를 때는 욕심부리느라 나를 잃어버리고 여행에만 집중하느라 숨이 찼다. 마지막날에는 기진맥진 온몸이 쑤시고, 탈진해서 그것이 여행의 당연한 기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행의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고행의 뿌듯함이었다.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마음으로 찾은 오늘의 첫 목적지는 카멜리아 힐이었다. 아름다운 동백꽃들을 바라보며 꽃길을 걸을 수 있는 곳. 제주가 아니라면 하기 힘든 경험이다. 초록빛 잎과 빨강의 꽃잎은 제주의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이곳의 동백은 세계 다른 나라의 동백꽃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동백꽃들이 있어서 보는 즐거움도 큰 곳이었다. 동백꽃뿐만 아니라 가을정원의 아름다운 갈대들 또한 즐길 수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방주교회였다. 이곳은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의 건축물이다. 제주도의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등도 그의 작품이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듯 물 위에 떠 있는 교회. 방주교회는 흘러 흘러 어디로 향해 가는 걸까. 나의 삶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나의 삶이, 내가 타고 있는 이 배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이 흘러 지금의 내가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내가 내 삶을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물론 내가 타고 있는 이 삶의 배가 어디로 향할지 방향은 내가 정한다. 삶에서 어떤 것을 추구하고, 가치롭게 여길지 그래서 내 삶의 배가 최종적으로 어떤 항해를 할지는 스스로 정한다. 그러나 배가 흘러가는 바다의 파도와 물살, 기온, 바람, 온도, 태풍, 비, 항해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제어할 수도 없으며, 창조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만나면 빈 배가 되어 마주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 안으며 나아가고 싶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항해를 즐기며 ‘나’를 버리고 빈 배가 되어 흘러가고 싶다.    

  





방주교회를 나와 다음으로 오른 곳은 정물오름이다. 처음 제주를 왔을 때 오름이라는 것을 오르고, 김영갑 갤러리의 오름 사진들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반했었다. 사람의 몸처럼,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푸근한 오름의 선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높은 산을 오르기는 힘들고, 평탄한 길을 걷기에는 아쉬울 때, 그럴 때 오름을 오르면 좋다. 둥글둥글한 오름의 언덕을 걸어 올라간다. 언덕을 오르는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언덕을 오를 때 나는 과거의 사람이 되는 듯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노곤한 마음으로 한 손에는 포도주를 들고 언덕을 하염없이 오르는 농부가 된 기분이랄까. 언덕을 오른다는 것은 나에게 그런 신기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내 안에 흐르는 과거의 사람, 농부의 DNA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해야 할까.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정물오름을 내려와 조선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제주추사관을 방문하고 대정 5일 시장에 들러 홍매향도 맛본 후 모슬포 해변을 걸었다. 이곳은 너무나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검은 현무암과 바다, 햇살에 부서지는 파도의 반짝임. 너무나 완벽하게 어울리는 풍경. 그 풍경을 배경으로 시장 안 사람들은 부지런히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팔고, 손님들은 흥정을 하며, 삶을 꾸려간다. 이 풍경이 주는 안도감과 평화로움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풍경이다. 그리고 제주만의 풍경이다.      






나는 일상을 살 듯 여행하는 동시에 그냥 내 삶 전체가 여행이 되기를 원한다. 삶 전체가 여행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순수한 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상을 자동장치를 작동시키듯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으며 음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이든 인공물이든 사람이든 그 안에 깃든 본연의 생동감을 무시하지 않고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빈 배가 되어 바다를 항해하며 만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며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덕을 오르는 농부가 되기도 하고, 타지에 유배되어 고독하지만 의미 있는 자신의 세계를 탐구하는 학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풍경에 담겨있는 본연의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감사하며 감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마주친 모든 것들이 항상 평화롭고 건강하며 행복하기를 기원하기.


그 모든 것이 삶 전체가 여행이 된다는 것이고, 나는 그런 삶을, 그리고 여행을 이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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