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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10. 2024

내가 걷는 이유

한라산 둘레길 - 돌오름길

2024년 1월 7일 일요일     


벌써 제주 보름살기 다섯째날이다. 시간이 정말 금방 간다. 날씨가 추워져 오늘 제주의 기온은 최저 4도, 최고 8도 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한라산 둘레길 중 돌오름길. 서귀포자연휴양림을 가려고 했는데, 근처에 돌오름길 입구가 바로 버스정류장 옆에 붙어 있길래 걸어보기로 했다.      


한라산 둘레길은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일제강점기 병참로와 임도, 표고버섯재배지 운송로 등을 활용하여 무오법정사, 시오름, 수악교, 이승악, 사려니 오름, 물찻오름, 비자림로, 거린사슴, 돌오름 등을 연결하는 80km의 한라산 환상숲길을 말한다. 총 9개의 길이 있는데 천아숲길, 돌오름길, 산림휴양길, 동백길, 수악길, 시험림길, 사려니숲길, 절물조릿대길, 숫모르편백숲길이 그것이다. 이 중 내가 걸어본 길은 사려니숲길과 숫모르편백숲길이다. 사려니 숲길이야 워낙 유명하여 여러번 갔었고, 숫모르편백숲길은 우연히 갔다가 반하여 이번 보름살기 중에도 다시 갈 예정인 길이다. 한라산 둘레길을 모두 가본 것은 아니지만 한라산을 오르기에는 부담스럽고, 올레길을 걷기보다는 숲을 산책하고 싶거나 조금 긴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을 때, 원시의 숲을 만나고 싶을 때 걸으면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가 갈 길은 한라산 둘레길 2구간 돌오름길로 보림농장 삼거리에서 서귀포 자연휴양림 입구까지 8km의 구간을 걷는 길이다. 색달천이 흐르고 졸참나무와 삼나무, 단풍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자라는 곳이다. 나는 버스로의 접근성을 위하여 서귀포 자연휴양림입구에서 길을 시작하기로 했다. 1100도로 입구 정류장에서 240번 버스를 타고 서귀포자연휴양림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돌오름길을 시작할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은 240번 버스의 배차간격이 1시간 가량으로 버스시간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트레킹을 시작하기전 시간표를 사진으로 찍고 대략 시간을 가늠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돌오름길은 시작부터 울창한 삼나무길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뽐내는 곳이다. 나무들이 말을 건네는 듯한 고요한 숲. 나의 몸상태가 괜찮았다면 이 신비로운 숲의 고요를 충분히 만끽하였을 텐데 오늘 나의 컨디션은 그닥 좋지 못했다. 게다가 날씨까지 갑자기 추워져 눈이 날리고, 바람이 불어 숨을 쉬기 힘들었다. 제주는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정말 따뜻하다. 그러나 한번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거기다 눈비까지 오기 시작하면 정말 추워진다. 게다가 산의 바람은 바다의 바람만큼이나 매섭다. 구름을 벗어난 햇살이 따뜻하게 조금이라도 비추면 어찌나 따뜻한지 그 빛에 의지해 조금씩 앞으로 걸어나갔다.      






사실 중간에 그냥 포기하고 돌아올까 계속 망설였다. 그러나 길이 아름다웠고, 조금씩 보여주는 한라산의 속살이 궁금해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다. 힘들어 포기할라치면 나타나는 계곡의 아름다운 자태와 나무들, 신비로운 풍경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눈이 내리다가도 어느새 그치면 눈부신 햇살이 하늘 위에서 쏟아져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중간쯤 갔을 때는 그냥 다리가 자동으로 제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몸이 너무 힘들면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사람은 어느정도는 고통을 즐기는 감각이 있는 것일까. 인내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은 오히려 사람에게 이상한 희열과 묘한 쾌락을 던져주는 듯하다. 그냥 그렇게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듯 빨간 구두를 신고 영원히 춤을 추는 여자의 발처럼 움직이는 몸뚱이인데도 그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살아있구나. 그런 살아있음의 감각이 있는 그대로 느껴졌다.     







결국 그렇게 숲의 아름다움에 취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고, 물을 마시며 조금 숨을 돌렸다. 다시 눈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거세어졌다. 도시락을 정리하고, 숲을 음미할 새 없이 출발했던 것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에는 날씨가 좋은 가을 또는, 여름에 이 길을 찾아야겠다. 그때는 제대로 숲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걷고 싶다. 하지만 살아있음을 느끼며 고통과 함께 걸어나갔던 이 길도 잊지 못할 것 같다.      


길은 걸어보기 전에는 그 여정이 어떠할지 예측하거나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매력있다. 내가 길을 걷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 걸어보기 전에는 그 길을 알 수 없어 설레이고, 걸어보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그리고 풍경이 나를 맞이한다. 그 길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길을 똑바로 걷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호텔로 돌아와 아주 오랫동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약을 먹고 요가를 하니 살 것 같다. 오늘도 아주 아주 푹 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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