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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Jan 20. 2024

문화유적을 탐구하며 옛 건축의 멋에 취하다

수원화성 성곽길(수원팔색길)

옆 동네 여행지로 좋은 곳은 집이나 회사에서 가깝고, 종종 들르기도 하는데 깊게 알아본 적은 없는 곳들입니다. 같은 구에 속해 있는 매력적인 동네 혹은 정감이 가는 동네를 방문해 보세요. 거창한 콘텐츠가 있는 곳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분위기 있는 서점이나 카페, 작은 호수 같은 소박한 목적지를 정해 보세요. 여행자의 눈으로 그 동네를 걷다 보면 곁에 두고도 몰랐던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 <작은 여행, 다녀오겠습니다>, 최재원 지음 




<작은 여행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떠나느냐가 아니라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책이에요.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이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퇴근 후 우리 동네를 여행자의 기분으로 여행해 보기, 평소 안 가본 곳들을 그냥 가보기, 옆동네에 숙소를 잡고 여행 떠나기,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러 떠나는 여행하기 등 지금 당장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여행들입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도 그 기분이 궁금해서 옆동네 수원에 있는 수원화성을 목적지로 정하고 여행자의 신분으로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제가 걸은 길은 수원팔색길 중 하나인 화성성곽길입니다. 수원팔색길은 수원의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들을 모아놓은 둘레길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중에 화성성곽길은 화서문을 시작으로 순환하여 걸으며 수원화성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약 5km의 길입니다. 옆동네이기 때문에 종종 산책하던 곳인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루트대로 걸어본 적은 없는 곳이에요. 오늘은 이곳을 여행자로서 걸어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설렙니다. 







수원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팔달문에 도착했습니다.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으로 팔달문이라는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개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요. 또 군사적 목적에서 옹성의 문과 출입문이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통인데 비해, 팔달문과 장안문(북문)은 모두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는 팔달문이 단순히 내부를 지킨다는 의미보다는 이름처럼 세상과 연결되도록 하는 통로역할을 하는 개방적인 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팔달문을 중심으로 옆에는 수원 시민들이 애용하는 전통시장도 있고, 정말 이름대로 사방팔방 길이 열린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여행자의 눈으로 팔달문을 보니 왠지 낯설게 느껴졌어요. 자주 보던 곳인데도 완전히 새롭게 느껴집니다.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팔달문의 위용과 아름다움이 낯설게 느껴져요. 하나하나 뜯어보며 감상합니다. 







팔달문과 그 옆의 전통시장





팔달문을 한 바퀴 돌아 서쪽부터 돌기로 합니다. 시작부터 가파른 계단을 오릅니다. 원래는 팔달문과 연결된 성곽길이 있었을 길에 이제는 가게들과 건물들이 길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끊겼던 성곽길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도 과거의 성곽을 지키던 병사의 발걸음으로 한 계단한계단 길을 오릅니다. 






계단을 다 오르고 아래를 보니 이렇게 멋진 풍경이 보입니다. 저 멀리 아까 보았던 팔달문이 서 있고,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이 팔달문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이 길 위에 서 있었을 병사들과 저 아래 마을에 살았을 사람들의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과거의 것이 없어지지 않고 이렇게 남아 지금의 것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타임 먼 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여행을 즐기는 기분까지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된 문화유적지를 걷고 돌아보며 여행하는 것일까요? 미래에는 이곳이 또 어떤 풍경으로 바뀔지 궁금해집니다.




서포루




이곳은 서포루라고 하는 곳입니다. 포루는 돌출시킨 성벽의 내부에서 적을 공격하도록 만든 군사 시설물을 말합니다. 군사 대기소의 역할도 했는데, 화성에는 북동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 동포루 등 모두 다섯 군데에 설치되어 있고, 서포루는 서쪽에 위치한 포루랍니다. 위의 누각은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고, 복원한 것이지만, 아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었고 해요. 한쪽 면에는 귀여운 야수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도깨비 같기도 하고, 상상 속의 동물을 그려놓은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귀엽습니다. 용맹스러우면서도 무섭지 않고, 정감가는 캐릭터 같다고 해야할까요? 이 누각에서 군사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했을까요? 




서장대


서포루를 지나 걷다 보면 이렇게 멋진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서장대입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지휘소입니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습니다. 힘찬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이랍니다. 정말 달필이지요? 정조는 이곳을 참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습니다. 1795년 성조(군사훈련)가 끝난 뒤 이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하여 '시문' 현판까지 직접 걸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지은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하는 서장대에서 정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서장대에 올라 밑을 바라보면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풍경



서장대 위쪽에는 이렇게 특이하게 생긴 것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서노대라고 하는 곳입니다. 언뜻 제단처럼 보이기도 하고, 첨성대 같은 관측 장소 같기도 한 이곳은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노대랍니다. 쇠뇌란 활을 사람의 힘으로 당기지 않고 고정틀에 화살을 올려 물리고 화살을 올려 발사장치를 통해 쏘는 기계식 활입니다. 저도 올라가 봤는데 계단이 꽤 가팔라서 다리가 후들후들 거렸답니다. 


서노대



서장대에서 팔달산의 기운을 담뿍 느끼고 다시 성곽길을 걷습니다. 여행자의 눈으로 이곳을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성벽 틈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서북각루(감시용 시설) 신발을 벗고 올라가 성 전체를 조망하기도 하며 적극적으로 탐험해 봅니다. 전에는 느끼지 못한 수원화성의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곳이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곳이었다니. 어디를 여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눈과 마음으로 여행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좀 이해가 됩니다. 



서북각루




화서문



걷다 보니 벌써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에 도착했습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설치했습니다. 조선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서문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랍니다. 아까 보았던 팔달문과 비교하면 훨씬 소담하고 귀여운 느낌을 줍니다. 화서란 이름은 낙양성의 서쪽 대문인 ‘서화’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해요. 건립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고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별돌의 색깔이 모자이크처럼 남아 조각보 작품을 보는 듯해요. 옛 건축물들은 세월의 흔적이 쌓여 그 고풍스러움이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곳은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長安門)입니다. 화성에는 한양과 마찬가지로 동서남북 4대 문이 존재합니다. 보통 성의 정문은 남문인 경우가 많지만, 화성은 북쪽에서 오는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인 북문이 정문이라고 합니다. 장안문(長安門)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 수, 당의 수도였던 장안에서 따온 것이고요. 당나라 때의 장안처럼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염원이 담긴 뜻이라 합니다. 

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장안문은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보다 규모가 큰 성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라는 것! 저는 4대문 중에 이 장안문이 수원화성의 문 중 가장 위엄 있게 느껴집니다. 수원화성을 건설함으로써 정조가 퍼뜨리고자 했던 이념과 사상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왠지 이 문을 지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고, 경건한 자세가 되는 것을 느낍니다.





북수문(화홍문)과 그곳에서 바라본 수원천


수원천



장안문을 지나면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것에 설치한 수문인 북수문(화홍문)을 만납니다. 7칸의 홍예문(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홍수를 대비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고 합니다. 장마철이나 비가 혼 뒤에 이 7개의 문에서 흘러내리는 문이 장관이라 하여 수원 8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답니다. 여름이면 수원 주민들이 이곳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바람을 쐬면서 풍류를 즐기기도 한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공간은 좋은 풍경을 보여주니 사람이 모이고, 에너지가 흐르는 좋은 곳이 되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올여름에 이곳을 다시 찾아 마루 위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싶습니다.



화성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동장대와 봉돈



요즘 행궁동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인 방화수류정도 한 바퀴 돌고 벤치에 앉아 연못의 새들을 감상했습니다. 봄, 여름이면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크닉을 하며 꽃과 햇볕을 즐기는데, 겨울의 한적한 방화수류정도 멋이 있습니다. 

병사들이 무예를 수련했던 동장대를 지나 봉돈에 다다랐습니다. 봉돈은 화성의 군사시설의 중 하나로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 제압하는 돈대의 기능과 봉화를 담당하는 봉수대의 기능을 함께 수행했습니다. 위쪽에는 5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수원화성 근처에는 수원화성박물관이 있습니다. 원래는 이곳을 다 돌고 박물관에 들러 수원화성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으나 12000보 가까이 걸었더니 다리가 아파 오늘의 작은 여행은 이곳에서 마무리합니다. 거의 3시간을 8키로미터 가까이 걸었더군요. 오늘은 성의 안쪽을 돌았으니 다음에는 성의 바깥쪽을 살짝 돌고 박물관에 가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작은 여행은 문화유적을 탐구하며 옛 건축의 멋에 취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해설판도 꼼꼼하게 읽고, 벽돌과 단청도 하나하나 뜯어보며 그 멋있음에 감탄도 하며 즐거운 견학을 했습니다. 옛 건축물이나 문화유적지는 알면 알 수록 그 세계가 깊고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의 멋지고 이국적인 여행지도 좋지만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서린 옛 유적지들을 공부하고 답사해보고 싶어요. 그냥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여행자의 눈으로 찬찬히 보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고귀한 멋이 잠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면 그 멋과 아름다움을 어디서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와 이 나라에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곳이 여행지가 됩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곳을 견학할지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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