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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Feb 03. 2024

겨울 고요와 비움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경주 겨울 여행 - 석굴암, 불국사/미니멀리스트의 여행가방

수원역에서 경주로 가는 ktx열차를 탔다. 2시간이면 경주에 도착한다니. 세상이 참 좋아졌다. 내가 탄 열차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경주에 도착했다가 부산으로 가는 기차였다. 기차 안은 평일임에도 예상외로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모두들 어떤 목적과 사연을 가지고 기차를 탄 것일지 궁금해하면서 나는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여행지로 가는 열차 안에서 내가 주로 하는 것은 핸드폰으로 전자책을 읽는 것이다. 밀리의 서재를 구독 중인데 미리 읽고 싶은 책을 서재에 넣어두었다가 이동 중에 읽는다. 오늘은 핸드폰 대신 아이패드를 이용해 책을 읽었다. 



아이패드로 읽은 책



여행 중 숙소에서 글을 쓰기 위해 가져온 아이패드다. 지난번 제주 보름 살기 때에는 노트북을 가져갔다. 글쓰기에는 좋았지만 너무 무거웠다. 미니멀리스트의 짐에 노트북은 조금 많이 무겁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아이패드와 무선 접이식 키보드를 이용해 글을 써볼 생각이었다. 글을 쓰는 도구에 따라 글쓰기의 내용과 형태가 달라질까. 그것을 실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이번 여행은 5일간 경주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그래서 최대한 간소하게 짐을 꾸렸다.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나에게 여행짐을 싸는 것은 언제나 재밌는 도전거리다. 여행을 할 때마다 나의 미니멀한 짐 싸기 실력은 진화해서 지금은 아주 작은 배낭 하나에도 5일간의 여행짐을 가뿐하게 쌀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미니멀하게 짐을 싸기 위해서는 정말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가져가지 않으면 된다. 나의 가방에 들어간 선택받은 물건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미니멀리스트의 여행짐 리스트


충전기, 아이브로우, 틴트, 스킨, 로션, 속옷, 마스크, 물병, 보조가방, 아이패드, 무선접이식 키보드, 보조배터리, 비상약, 귀마개, 칫솔세트, 비누, 트리트먼트, 옷, 잠옷, 양말 1개, 모자, 미니우산, 볼펜과 노트


나만의 미니멀한 짐 싸기 기술이자 팁은 다음과 같다.

1. 화장을 하지 않으면 메이크업 용품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아이브로우와 틴트정도만 챙겨도 간단한 메이크업한 얼굴처럼 보일 수 있다.

2. 속옷, 양말은 1개만 챙긴다. 손빨래로 번갈아 입는다.

3. 작은 물병을 여행 중 가지고 다니면 무거운 생수병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200ml짜리 가벼운 미니보온병은 주머니에도 쏙 들어간다. 식당이나 정수기에서 리필. 플라스틱 생수통을 쓰지 않아도 되니 더 좋다.

4. 귀마개가 있으면 소음차단이 안 되는 호텔에서 요긴하다.

5. 비누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머리 감기, 바디워시, 얼굴세안까지 올인원. 도브 비누를 반으로 잘라 거품망주머니에 넣어 작은 비닐봉지에 넣으면 물기도 없고, 뽀송하게 보관가능. 도브 비누를 추천한다. 이걸로 머리 감고, 트리트먼트만 하면 머릿결이 샴푸로 한 것보다 더 좋다. 얼굴도 촉촉해서 만족.

6. 여벌 옷은 하나만 챙긴다. 정말 편하고 따뜻하며 좋아하는 옷 한 벌만 챙긴다.

7. 볼펜과 노트, 아이패드는 글쓰기를 위해 필수.



이 정도만 쌌더니 어깨가 편안한 정도의 미니멀한 여행가방이 완성되었다. 언젠가는 이 배낭보다 더 작은 배낭을 꾸려 지리산 둘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 나의 목표다.


11시 경주역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예약한 호텔로 갔다. 짐을 맡기고, 보조 가방에 물과 모자만 챙겨 호텔을 나왔다. 첫 번째 목적지는 동성시장이었다. 10분 정도 설렁설렁 걸어가니 할머니들께서 각종 물건과 먹을거리들을 좌판에 늘어놓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따뜻한 남쪽 경주의 공기를 한껏 음미하며 시장을 둘러보았다. 경주의 동성시장은 좁은 골목길에 식당들과 가게들이 타닥타닥 붙어서 간판도 아주 조그마해 어느 가게가 어느 가게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였다. 동성시장에서 유명한 우엉김밥도 보이고, 떡볶이, 김밥, 순대, 유과, 찹쌀떡 등등 다양한 먹을 것들이 모여있었다. 

동성시장에는 한식 뷔페라는 것이 있는데 싼 가격에 다양한 반찬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모여있는 상가도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심하다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화기애애 들려오는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겨운 사투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머니들이 삼삼 오오 모이셔서 담소를 나누며 순대, 김밥, 떡볶이, 잔치국수, 전, 튀김, 비빔밥 등을 먹고 계셨다. 어떤 식당에 들어갈지 고민이 될 때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선택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거의. 고독한 미식가가 되어 시장을 훑으며 어디로 들어갈지 배회하는 것은 즐겁다.


나는 비빔밥을 시켰는데 역시 맛있었다. 5000원에 이렇게 맛있는 비빔밥이라니. 경주 시장 로컬 밥집의 물가는 아직도 착했다. 요즘 5000원이면 밖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 정도 맛있는 비빔밥이 이 가격이라니 감탄하며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갔는데 다 경주 지역 사람들이었다. 관광객은 나 혼자.

나는 여행지에서 식사를 할 때 이렇게 관광객은 없고 지역 사람들만 있는 로컬 밥집을 좋아한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나 블로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맛집들은 거의 대부분 비싸기만 하고 맛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로컬 사람들이 그냥 평범하게 매일 들르는 식당들이 의외로 더 맛이 있는 경우가 많다. 매일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기에 특별하거나 비싸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다정한 맛이 난다. 엄마가 해주신 것처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 여느 블로그 맛집들의 음식은 한 번이면 족하다. 매일 그 음식을 먹는다면 일주일 만에 질릴 거 같다.


경주 로컬 맛집에서의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시장을 빠져나와 불국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불국사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석굴암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갔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1시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기에 주저 없이 버스를 탔다. 수학여행 때 왔다가 그 이후로는 오늘이 처음인 석굴암. 너무 오래전이라 석굴암 가는 길은 처음 걷는 길인 듯 새로웠다.






석굴암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돌을 파서 그 안에 부처를 모시는 게 쉬웠지만 우리나라 산은 단단한 화강암이 많아 굴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돌을 쌓아 올려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게 되었고, 세계적으로 유일한 인공석굴이 탄생하게 되었다. 사각형의 앞방을 지나면 원형의 뒷방이 이어지는데 둥근 천장은 360여 개의 넓적한 돌을 교묘한 건축기술을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751년에 세워진 이래 무려 1200여 년이 넘도록 보존되고 있는 석굴암은 여러 가지 과학기술이 동원되었기에 가능한 유적이다. 이곳은 평지가 아닌 샘이 흐르는 터에 일부러 건축하였다. 샘물을 사원 밑으로 흐르게 하여 내부의 습기가 아래로 모이게 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열린 구조로 설계하여 자체적으로 습도조절과 환기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사람들이 잘못된 보수공사를 하여 사원은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파손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외부에 목조 전실과 유리벽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다.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유리문을 넘어 직접 석굴암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출처 : 석굴암 홈페이지


석굴암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분명 아주 예전에 석굴암을 방문하였을 때는 유리벽 없이 본존불과 내부를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리창 너머 어렴풋하게 보이는 본존불과 석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대단했다. 몸을 감고 흘러내릴 듯 주름진 얇은 옷의 표현과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의 표정, 보는 이를 고요한 세계로 인도하는 다문 입과 앉은 자세.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나는 불교 미술이 주는 신비로운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나’라는 것은 없다는 진리. 무엇을 추구하든 그것은 결국 자비와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전해지는 듯했다.




석굴암을 나와 불국사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은 버스가 아닌 토함산의 일부를 걸어가며 산을 느끼고 싶었으나 물어보니 지금은 등산로를 정비하는 공사 중이라 이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신라 중대의 재상인 김대성이 만든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매일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 할 정도였는데 어느 날 전재산이나 다름없던 작은 밭을 시주하자고 어머니를 설득해 밭을 시주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김문량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났고, 아이 손에는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금 간 자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다시 태어난 김대성은 전생의 어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이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겨울의 불국사는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초록은 모두 땅으로 떨어져 나무들이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연못의 물은 얼어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뭇잎도 흐르는 물도 모두 없는 와중에 산사만 오롯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오늘은 바람도 없이 따뜻한 햇살만 비추어 절의 아름다움이 한껏 돋보이는 풍경이었다. 

초록이 짙푸르고 꽃이 활짝 피어 화사한 절도 좋지만 이렇게 텅 빈 겨울의 산사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절 지붕의 곡선과 그 곡선들이 만나 이루는 선들의 조화, 맑은 겨울 공기 속 또렷하게 보이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우아한 곡선, 질감이 느껴질 듯 반짝거리는 탑의 돌 표면, 오랜 세월 바람과 빛에 바래 희미해진 나무 문살과 문양, 돌로 만든 계단의 화려한 건축형태.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겨울의 산사는 비운 상태에서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다. 초록의 나뭇잎과 화려한 꽃들과 사람도 없는 텅 빈 상태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나는 무엇을 쥐고 있는가. 무엇을 손에 쥐고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끌고 가고 있는가. 모든 잎을 떨구고 봄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더 비우고 더 비워서 텅 빈 고요를 만끽하고 싶다. 그 고요 안에서 조용히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가 되어 숨 쉬고 싶다.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의 고요함이 나에게 그 비움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욕망과 욕심,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피하려는 마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분별심, ‘나’라고 착각해서 채우고 꾸미는 자아까지.


모든 불필요하고 헛된 것들을 비우고, 고요한 진리의 세계에 살고 싶다. 텅 비워 고요해진 마음의 눈으로 세계를 또렷하게 보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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