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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Feb 06. 2024

경주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경주여행 -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오늘은 경주의 바다를 보러 간다. 경주 시내권은 분지 안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고, 바다는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왔다. 바다로 향하는 길, 버스 창밖으로 감은사지와 문무왕대왕릉을 보았다. 버스에 내려 천천히 보고 싶지만 이 쪽은 버스가 자주 있지 않아서 한 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온다. 저 멀리 창밖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드문드문 보이는 경주의 바다는 감청빛 진한 색을 넘실대며 파도치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매우 흐림. 간간이 비가 내릴 예정이지만 양이 많지 않아서 거의 내리지 않는다. 바닷속을 달리듯 긴 지하터널을 지나고 원자력 발전소를 지나 하서항에 내렸다.


감은사지
하서항



오늘의 코스는 하서항에서 읍천항까지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을 걷고, 이어서 나아해변까지 더 걷는 것이다. 이 길은 해파랑 10코스의 일부이기도 하다. 해파랑길 10코스 중간즈음 양남에 해수온천랜드가 있다는데 바다를 보며 온천찜질이라니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다시 오고 싶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을 걷기 시작한다. 흐린 날씨에 바람이 매우 거세다. 롱패딩을 목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써서 춥지는 않다. 그러나 바람이 거세어 앞으로 나가는 걸음걸이가 매우 느려진다. 경주는 분지라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데 바다는 다르다. 제주도처럼 거센 바람이 파도를 흔들어놓고 있다. 데크길을 따라 걸으며 오른쪽으로 검은 주상절리들을 구경한다. 간간이 소나무들이 암석 위에 자라나 해풍을 맞고 있다. 경주 남산을 오르면서 생각했지만 경주에는 소나무가 참 여기저기도 많다. 높은 산 위 기암괴석 위에도 자라나고, 여기 바닷가 암석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다. 그 생명력이 참 경이롭다. 자신이 뿌리내릴 곳이 어디든 환경에 개의치 않고 그저 위로 밑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그 용맹함과 한결같음이 대단하다. 나는 조금만 나에게 불리한 환경, 불편한 상황이 펼쳐지면 그것을 피하거나 돌아가려고 하는데 소나무에게 인생을 한 수 배운다. 법륜스님의 말처럼 천국도 지옥도 내가 만드는 것이요, 내 마음 하나가 모든 것을 만든다. 수처작주의 자세로 소나무처럼 뿌리내리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내가 있는 곳을 극락으로 가꾸어 나가자.




파도소리길 중간에 주상절리 전망대가 있어 올라가 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니 주상절리와 데크길, 저 멀리 등대와 짙푸른 바다, 갈매기, 하늘이 어우러져 감탄할 만한 풍경이 보인다. 어제 남산도 그러했지만 주상절리와 바다도 자연만큼 위대한 예술가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오랜 세월 자연의 힘과 작용으로 만들어진 주상절리와 어우러진 바다의 예술. 이것을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연은 누구보다 탁월한 예술가이다. 나도 자연처럼 나의 시간을 쌓아 올려 예술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완성하고 싶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게 여기며 잘 쌓아가자.








읍천항에 이르니 하얀 등대, 초록 등대, 빨강 등대가 하나씩 사이좋게 서있다. 등대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딘가로 떠나는 배에게 길을 알려주는 빛의 존재. 바다에 떠 있는 인간의 흔적. 등대는 바다의 섬이다. 인간의 섬. 그래서 보고 있으면 무언가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등대를 나침반 삼아 걷다 보니 어느새 나아해변에 도착했다. 나아해변 위쪽으로는 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노란 등대가 마주하고 있다. 이곳에는 해파랑길 인증 스탬프도 있다. 해변가에 앉아 잠시 파도소리를 들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경주의 바닷가에 앉아있으니 이곳이 마치 낯선 나라처럼 느껴진다. 오늘 날씨는 흐리고, 미스트 같은 빗방울이 흩날리며, 바람이 거세다. 그런 날씨까지 한몫해서 이곳이 어디인 줄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여행을 하는 중에 가끔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낯선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때는 주로 가만히 풍경을 마주하고 앉아 멍을 때릴 때다. 아무 생각 없이 풍경에 녹아 그냥 앉아 숨 쉬고 있을 때.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그런 모르겠음의 느낌이 훅 하고 온다. 나는 이 낯선 느낌이 좋아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시간에 한 대 있는 귀한 버스를 타고 다시 경주 시내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두 번째 목적지인 경주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 도착해 먼저 성덕대왕신종을 보고, 종소리를 들었다. 녹음된 종소리는 생각보다 작고 섬세했다. 거대한 종의 크기만 보고, 크고 우람하며 남성적인 소리를 상상했는데 그렇지 않아 놀랐다.




 물품보관함에 짐과 옷을 넣고, 가벼운 몸으로 역사관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금의 나라 신라답게 박물관에는 각종 화려하고 진귀한 유물들이 가득했다. 금관, 목걸이, 귀걸이, 신발, 그릇, 유리, 구슬, 허리띠, 팔찌, 반지 등 각종 금으로 만든 것들이 가득하다. 주로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이었다. 몇몇 장신구들은 지금의 디자인적 시점으로 봐도 매우 현대적이고 탐이 나는 모양이다. 우아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단순한 디자인부터,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디자인까지. 정말 다양하다. 산업사회의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 생산품은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장인의 솜씨와 땀이 어린 문화재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무장해제된다. 장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물건을 만들었을지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된다. 그는 이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만든 아이 같은 이 불상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아마도 장인은 자신이 만든 것을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애지중지하며 그것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 세상에 나왔는데도 그 아름다움이 전혀 바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만히 그것들을 바라보며 장인의 마음이 되어 사랑의 마음을 품어본다.











가장 인상 깊었던 유물은 신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수막새와 경주 백률사에서 출토된 약사여래상이다. 인간의 얼굴을 이렇게 섬세하게 기와에 표현하다니, 그 얼굴 안에 희로애락 인간의 모든 감정이 녹아있는 듯하다. 특히 눈꺼풀과 입가의 선이 희로애락 중에서도 기쁨의 미소를 드러낸다. 수막새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이런 미소를 머금으며 삶을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앉아 바라보았던 백률사의 약사여래상.

초연하고 해탈한 미소라고 하기엔 너무나 다정하고 온화한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무심한 듯하지만 무심하지 않고,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드러난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나에게 삶을 여여하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말고, 욕심과 욕망, 집착과 분별을 내려놓고, 손에는 아무것도 쥐지 말고 걸어가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 여여한 마음을 간직한 채 박물관을 나와 국립경주 박물관내 신라천년서고라는 도서관에서 잠시 책을 본 후 숙소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바다와 고귀한 보물들을 한 껏 보아 눈이 촉촉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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