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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Feb 05. 2024

이것을 보지 않고서 경주를 보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주 남산 보물찾기

오늘의 목적지는 산 전체가 보물이라는 경주의 남산이다. 남산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오봉과 고위봉의 두 봉우리와 60여 개의 골짜기, 그리고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남산을 걷고 난 지금은 ‘남산을 보지 않고서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남산은 국보가 1점, 보물이 12점, 절터가 147곳 등 선사유적지까지 그 현황을 살펴보면 무려 694개에 이르는 유적과 유물이 숨어있는 노천 박물관이다. 신라시절 남산에 있는 사찰은 150군데가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밤에 남산을 보면 법당 안 촛불들로 인해 은하수를 보는 듯했다고 한다.

남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내가 오늘 오른 코스는 남산 탐방의 가장 대표적인 코스로 삼릉에서 시작해서 용장사지까지 이어지는 서남산 일주코스다. 삼릉 역사문화탐방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남산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탐방할 수 있는 구간이다. 편도 4.6km로 내 걸음 기준으로는 14000보 가까이를 걸었다.






오늘 나의 걷기에는 주제가 있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걸으며 산과 문화재들을 온몸으로 음미하며 느끼는 것이다. 머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걷기. 사실 나는 지금까지 몸이 아니라 머리로 걸었다. 머리로 걸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걸으면서도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작 내가 현재 걷고 있는 길과 풍경을 진심으로 알아차리며 걷지 못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의미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경험하며 걷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생각으로 창조한 세계를 걸었다는 의미이다. 아무 관념이나 선입견 없이 순수한 눈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므로 순수하게 몸으로 걷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르게 걷고 싶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순수하게 걷기의 기쁨을 느끼며 걷고 싶다. 마치 이 지구별에 처음 도착한 외계인처럼 세상을 순수한 눈으로 사심 없이, 편견 없이, 관념 없이 바라보고 느끼며 걷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바로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걷는 걸음걸이 속도의 반의 반의 반의 반으로 줄여 아주 느리게,  더 느리게 걸어야 한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주 천천히 행동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급하게 먹는 음식의 맛은 음미할 수 없지만, 아주 천천히 느리게 먹는 식사는 있는 그대로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하루 종일 나의 시간을 이곳 남산에서 걷고 문화재들을 바라보고, 자연을 느끼는 데 쓸 생각이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남산을 올랐다. 한발 한발 아기가 걸음마를 처음 배우고 발을 조심히 내딛듯이 그렇게. 머리와 어깨, 양손이 파손되어 몸만 남은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만나고, 두 번째 문화재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을 만났다. 아주 커다랗고 평평한 바위에 부처와 보살을 선으로 새긴 작품이다. 자연암벽에 음각의 선으로만 새긴 것이어서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선각육존불.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맞아 그 형태와 색깔이 예전과 같지 않을 그 암벽을 가만히 앉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씩 암벽에 음각된 선을 조금씩 옅게 하고 있는 바람이 나의 얼굴에 닿는 것을 느껴본다. 돌에 새겨진 부처는 긴 시간을 버티며 지금도 이렇게 남아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이 육존불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나중에는 비와 바람과 하나 되어 시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육존불을 새겼던 석공이 죽고, 이 앞에서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도 죽고, 나처럼 남산을 오르며 이곳을 지났을 사람들도 죽고, 모두가 죽는 것처럼 이 선각육존불도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석공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부처를 새기며 동시에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간다'는 무상의 진리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그러니 세상사 그 어떤 것도 집착할 것이 없다. 무언가를 가지려고 욕심부릴 것도 없고,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밀어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만 삶에 나타나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가고, 이 육신도 그러하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모두 공으로 돌아갈 텐데 무얼 그렇게 집착했을까. 손에 쥐고 있는 것, 손에 쥐려고 하는 그것을 모두 놓아버리고 가볍게 자유롭게 세상을 살면 된다.



그렇게 계속 비우고, 또 비우며 남산을 오른다. 그리고 두 번째 보물인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을 만났다. 불상의 몸과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이 좌상은 원래 불상의 얼굴 아래쪽이 부서지고 광배도 떨어져 흩어져 있었다. 그것을 발굴, 조사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8-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불상의 눈과 눈썹, 콧등과 볼, 복원되어 주변부와 색이 다른 입부분이 한데 섞이니 기이한 느낌까지 준다. 한참이나 그 기이한 느낌에 홀려 불상을 바라보다 다시 길을 나섰다.




남산은 올라갈수록 그 풍채와 기세가 드러나는 산이었다. 처음에는 여리게 시작했다 점점 거세어지는 음악처럼 갈수록 암벽들과 괴석들이 나타나고,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장대한 그림을 만든다. 그 맛에 취해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남산의 하이라이트인 바둑바위를 만났다. 경주의 너른 들판과 마을, 도로와 강, 산과 하늘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그곳에 서니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제주의 오름처럼 낮고 유연한 산들이 어우러져 들판을 감싸 안고 있는데, 그 선들이 예술이다. 나는 지금까지 자연이라는 예술가만큼 위대한 예술가를 보지 못했다. 이 산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선들을 자연 말고 그 누가 창조할 수 있을까. 바다 위에 떠있는 생명체들 인마냥 들판을 전경으로 낮게 넓게 펼쳐진 선들의 향연이 너무나 편안하고 우아하다. 소박하고, 예스럽다. 바둑바위에 앉아 한참을 자연이 만든 예술을 감상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경주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들 중 손에 꼽을 만한 절경이었다.





바둑바위를 지나 산에 취해 천천히 걷다 보면 기이한 암석들이 어우러진 곳에 도착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조금 돌리면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남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새겨진 마애불인데 높이가 6m에 달한다. 어떻게 저런 곳에 불상을 만들 수 있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 곳에 불상이 존재감 있게 자리하고 있다. 마치 뒤에 있는 거대한 암석들의 일부인 마냥 아래를 굽어 보고 있는 마애불. 마치 한국지폐에 인쇄된 율곡 이이의 눈처럼 가늘고 눈아랫부분이 두툼한 선비의 눈처럼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형체와 분위기, 크기와 위치는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이 세상 것이 아닌듯하여 또 그 부조화가 예사롭지 않다.





석공은 왜 이런 곳에다 이런 마애불을 창조하였던 것일까.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돌에 부처의 모습을 새기고, 바라봤을까. 나의 상상으로는 그 석공은 아마도 이 마애불을 완성한 후 자신이 창조한 예술 작품에 말할 수 없는 열정과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동시에 부처와 진리의 세계에 대한 신심으로 마음이 벅찼을 것이다. 무언가 세상에 없던 것을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자신이 창조한 예술 세계에 대한 경애와 찬탄하는 마음이 인간에게는 있다. 그 마음이 이 엄청난 마애불을 창조할 수 있었던 마음일 것이다. 마음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신이 사는 세계 또한 마음이 창조한 세계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고 있다. 우주는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우주를 바라보며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가.




남산의 정상 금오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하산을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남산의 하이라이트이자 이번 경주에서 내가 만난 가장 숨 막히게 아름답다고 여긴 풍경이 아직 남아있었다. 바로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이다. 너른 터에 자연암석을 기반으로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 이 석탑을 그냥 평지의 절 마당 앞에서 마주쳤다면 나는 이렇게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은 평범한 평지가 아닌 아주 높은 산 절벽 위에 햇빛을 받으며 서 있다. 그리고 탑 앞으로는 산봉우리들이 탑보다 더 낮게 연이어 마주하고 있다. 마치 인간의 몸처럼 절벽 위에 서 하늘과 햇빛을 전신으로 맞이하고 있는 삼층석탑. 그의 뒷모습은 정말 한 사람의 인간을 보는 듯 생명감 있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풍기는 해탈한 스님인 것처럼 서 있는 탑의 몸. 그 몸이 전해주는 기운이 강해 나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누군가는 이 탑을 보고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눈까지 놓고 산을 내려간 듯 나무 위에 덜렁거리는 안경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안경을 두고 간 그 사람은 이 탑을 보고 깨달은 건지도 모르겠다. 몸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을 떠야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심안의 세계를 가만히 바라본다. 모든 것은 공으로 돌아간다. 몸의 눈으로 세계의 겉면만을 보느라 집착하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손에 쥐려고 욕심부리는 마음도 내려놓는다. 모든 욕심, 집착, 분별, 판단,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무심히 바라본다.


나는 경주 남산에서 만난 가장 무심하고 아름다웠던 이 풍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또 속세에 젖어 욕심을 부리고, 무언가를 움켜쥐고 아등바등 사느라 주인이 아닌 노예의 삶으로 되돌아갈 때 이 탑을 떠올리자. 절벽 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그저 맨 몸으로 바람과 햇빛을 받고 서서 산과 하늘을 굽어보는 이 삼층석탑의 몸을 생각하자. 그리고 그 삼층석탑처럼 곧게 서서 눈을 감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몸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떠 제대로 세상을 보면 그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남산 바둑 바위 위에 있던 엽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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