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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Feb 11. 2024

산책자의 가장 큰 특권

담양 여행 - 길에서 만난 친구와 관방제림을 걷다

봄을 조금이라도 미리 맞이하고 싶어 떠난 3박 4일 남도 여행. 그 여행의 첫 번째 시작 도시는 담양이다. 담양은 아주 오래전 엄마랑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갔던 곳이다. 그때 함께 걸었던 여름의 관방제림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봄을 맞이하는 겨울에 다시 담양을 오게 되어 기쁘다.


담양으로 오는 길은 조금 복잡하다.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광주 터미널로 가서 311번을 타고 한 시간을 더 가야 담양을 만날 수 있다. 점심때쯤 담양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죽녹원을 가장 먼저 들렀다. 푸르른 대나무의 향기가 청명하다. 사시사철 이런 푸르름을 갖기 위해 대나무는 열심히 광합성중이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대나무를 보고 있으니 명쾌한 기분이 든다. 나도 속이 텅 빈 대나무처럼 삶의 불필요한 것들은 비워내고 가볍게 살고 싶다.





사실 삶은 명쾌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 생각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내가 삶을 A라고 생각하면 A에 대응하는 세계가 펼쳐지고, B라는 삶을 생각하면 B에 대응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나는 어떤 세계를 살고 싶은가. 그것은 나의 생각, 마음, 선택이 결정한다. 그렇다면 나는 삶이 축제처럼 즐거운 세계, 대나무처럼 가볍고 청명한 세계를 선택하겠다. 숙제하듯 무언가를 해치우며 사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이 축제이고, 행복이고, 기쁨이고, 놀이인 삶. 나에게 삶은 설레고 즐거운 축제의 장이다.



겨울이고 비소식이 있는 흐린 날씨라 대나무숲의 풍경은 사진에 예쁘게 담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없는 덕분에 호젓하게 나 홀로 대나무 숲을 독차지했다. 선비의 길, 명상의 길, 사랑이 이루어지는 길, 한옥 체험관 등 다양한 풍경이 가득한 죽녹원의 산책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관방제림으로 향했다.






관방제림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담양을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이자 핫플레이스가 되면서 여기저기 예쁘고 단정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이 길을 걸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산뜻해지고 포근해진다. 옛날 길을 걷는 것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어떤 길을 걷는 기분이다. 전혀 살아본 적이 없는 동네임에도 마치 언젠가 이곳에서 터를 잡고 가족과 살았던 기분이 드는 아련한 길. 나에게 관방제림은 전생의 고향 동네인 것처럼 향수를 자극하는 곳이다.




개를 산책시키는 주민과 1~2명의 관광객, 산책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담양 천변의 제방과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숲, 관방제를 따라 이어진 1.2KM 길에 300년이 넘은 푸조나무, 팽나무, 멎나무, 은당품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천변을 지키고 있다.

죽녹원에서 시작해 전남도립대를 지나고 담빛예술창고와 추성경기장으로 이어지는 행복한 길을 걷는다.  백로가 묘기를 부리듯 지지대 위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얀 고양이가 나타났다. 배트맨처럼 이마에 까만 얼룩 가면을 쓰고 꼬리가 까맣다. 고양이는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 계속 나를 따라왔다. 아주 가까이 다가와 애교를 부리거나 다리사이를 맴돌지는 않는다. 그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함께 산책길을 동행해 주었다. 백로처럼 자기를 보라는 듯 좁다란 나무 지지대 위를 사뿐사뿐 우아하게 걷기도 하고 기지개도 켜며 이리저리 세계를 관찰하며 걷는다. 그러다 이따금 내가 사진을 찍느라 걸음을 멈추면 자기도 멈추어 쉰다. 벌러덩 누워 바닥에 등을 비비고 혓바닥으로 몸을 핥으며 몸을 웅크리고 있기도 한다.





마치 내가 혼자 산책하는 것이 신경 쓰여 나에게 산책 벗이 되어주려고 나타난 천사인마냥 계속 함께 했던 배트맨 고양이. 고양이와 나는 산책 친구가 되어 함께 길을 걸었다. 


"나비야, 너는 어디서 나타난 거니? 내가 심심할까 봐 계속 함께 걸어주는 거야?"


나는 나비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 없는 나비. 말없는 영혼과 산책을 동행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말이 없는 영혼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수다를 늘어놓거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그냥 함께 걸어주고 존재해 준다. 때로는 풍경을 관찰하고 세계를 음미하며 산책의 기쁨을 공유하기도 한다. 천변의 튀어 오르는 물새들의 소리와 바람결에 실려오는 겨울의 향기와, 어둑해지는 하늘의 미묘한 색들을 함께 나눈다. 그들은 멋진 산책 친구다.








그저 침묵 속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말과 언어를 잊은 채 풍경을 바라보며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산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치의 시간을 나에게 선물한다. 그렇다. 산책자의 가장 큰 특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만끽하며 '자연과 온전히 하나 되는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침묵하며 세계를 관찰하면서 아름다운 길을 걷는 멋진 산책자. 어디선가 몸을 웅크리고 새벽잠에 들어있을 그에게 멋진 시간을 함께 해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비와 걸었던 관방제림 산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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