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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지다사라지다 Nov 19. 2022

장례식 그리고 존엄성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는 장례를 소망하며

우리는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에게

죽고 나서는 평생을 감추고 살았던 몸을 맡깁니다.


저는 죽음에서 삶을 배우고 삶에서 죽음을 배우는 장례지도사입니다.


장례지도사는 아직까지 젊은이들에겐 생소한 직업입니다. 어르신들은 아직도 ‘장의사’라고 부르지요. 저는 고인과 유가족을 섬기고 배웅해 드리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 여겨 제 의지대로 직업을 선택했지만, 가족과 지인들은 대학 나와서 고작 한 다는 게 그 일이냐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꿋꿋하게 버텨서 벌써 경력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 이별 예식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을 합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연과 여러 형태의 가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죽음과 이별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고 매번 사무치도록 슬픕니다. 하지만 그중 유독 더 마음이 쓰렸던 분이 떠오릅니다.      


보통 제가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전 유가족들은 저와 상담을 하기 위해 상담실에 대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인분의 배우자나 자녀 등 3,4명 남짓 됩니다. 그날은 20대 남성 한 분이 어깨와 머리를 푹 숙인 채 혼자 앉아계셨습니다. 아직 다른 가족 분들이 도착하기 전인 것 같아 물었더니, 더 올 가족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인 분도 같은 또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고인 분과 친구분은 동성애 커플이고, 각자의 가족들에게 오래전 버림을 받아 서로를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구는 먼저 세상을 등지게 되었고, 그 고인을 애도할 사람은 법적 가족이 아닌 이 친구분 한 명이었습니다.     


푸르른 나이에 수많은 고뇌를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고인과, 그 고인을 홀로 지키기 위해 용기 내어 장례식장에 온 친구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무연고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일정 기간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이혼이나 사별 등의 이유로 가정의 형태가 변화하기도 하지만, 단지 성적 정체성 때문에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할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내가 죽을 때 사랑하는 이와 뜻깊은 이별을 나누고 싶고, 사랑하는 이가 죽을 때 온 마음을 다해 애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법적인 가족보다도 가까운 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장례의 변두리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저는 장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 예법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의 ‘존엄성’을 지켜드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장례는 지극히 유가족 중심의 장례입니다. 장례식장도, 음식도, 장식도, 심지어 고인이 입고 가실 수의까지 유가족이 고릅니다. 우리는 생전에 미리 장례를 준비한다는 것을 부정적이고 회의론적인 사고방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내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장례식에 초대되고 싶을까요? 장례의 궁극적인 의미는 사랑하는 이를 잘 떠나보내고, 남은 자들의 슬픔을 회복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 침울하고 무거운 장례식보다는 유쾌하고 재미있고 개성 있는 장례식이 우리의 치유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일상에 죽음이 끼어드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죽음이 당연한 듯 머무는 삶. 친구의 장례식이 열리면 모두 함께 추모하고, 한낮에 산책을 하며 봉안당을 둘러보는 삶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진정 애도함과 동시에 그것을 수용하고 상실과 변화를 이해할 때 비로소 행복한 삶과  행복한 죽음이 완성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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