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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지다사라지다 Oct 05. 2022

살아지다 사라진다는 것

이별이 주는 위로

 


 누군가 나에게 많은 직업 중 왜 하필이면 장례 일을 하냐고 물어오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를 긁적이며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혹시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냐고 재차 묻는다. 단언컨대 나는 이 일을 하면서 고수익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 일말의 기대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례 일을 해서 눈먼 돈을 주머니에 몰래 넣을 수 있는 시절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설사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하더라도 슬쩍 챙길만한 두둑한 배짱도 없다. 수입도 별 볼일 없는 데다 사회적으로 명예를 떨칠 수 있는 직업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하고 있는 것일까? 나도 그 사정에 대해 딱히 심도 있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미래에 비전이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적어도 정년 때 까지는 잘릴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잖아요. 고령화 사회로 인하여 사망자 수는 계속 증가할 테고, 그에 따라 장례에 대한 수요도 늘어날 것이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것도 결정적인 이유라곤 할 수 없다. 내가 이 일을 선택한 까닭에는 보다 철학적인 사색이 기초했다. 사람은 왜 태어났으며, 결국 어디로 가는가. 이런 물음은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래 뚜렷한 정답을 내리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나 역시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경쟁과 탐욕의 안개에 가려져 희박했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하게 만들 순 있었다. 오직 그것만으로도 나의 오늘은 충분히 빛난다.


 남들이 보기에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자행되는 죽음의 변주라 여길 수 있지만, 그곳에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회한과 사랑이 있다. 지금도 도심 속에 ‘장례식장’이란 간판이 보이면 인근 주민들이 떼 달라고 항의를 한다. 집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다. 아침에 장의차를 보면 재수가 좋다고 흔히 하는 말들도, 결국 내심 불길한 감정을 전도시키려는 술책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삶과 죽음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에도, 유독 죽음만은 터부시 되고 있다. 상실을 부정하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에서 기인한 현상이겠지만, 삶을 완성하는 힘은 죽음에 대한 소중한 자각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장례 절차 중 특히 입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한다. 심장이 멈춰버린 육신이 땅으로 하늘로 흩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라는 데에 의의가 있기도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감정의 응어리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곱게 수의를 입혀드리고 난 후 영면에 잠긴 고인과 한쪽 구석에 모여 흐느끼고 있는 가족들에게 말한다.

 “자.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에게 정말 감사했는데 표현하지 못하신 게 있으시거나, 서운하셨던 게 있다면 이쪽으로 다가와 말씀드리시고 모두 털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아버님께서도 모든 근심 걱정과 아픔 다 내려놓으시고 가볍게 훨훨 날아가십시오.”


 이 순간이 되면 서러운 울음과 함께 명치에 얹힌 듯 맺힌 그리움과 슬픔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긴 세월 응어리진 덩이가 고작 한 마디의 운으로 말끔하게 해소되긴 힘들겠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 고인을 온전히 그리워할 여유 공간을 마련해주는 셈이다. 이런 모습들을 거듭 보며 문득 사람 간의 해원(解冤)을 꼭 죽어서만 할 게 아니라, 살면서도 한 번쯤 해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를 위해 연금에 저축하는 것처럼, 죽음을 위해 인간사의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잘 살기 위해 채워가듯, 잘 죽기 위해선 비워야만 한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 질책하고 미워해서 무엇하랴. 결국엔 차갑게 식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후회하게 될 것을.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 내가 왜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단번에 떠오른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왜 이 일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지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없다. 일의 성과 여부를 떠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순간에도 머릿속에 그것이 떠나질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에 갔을 때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떠오르듯, 일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내가 일하는 공간에는 통곡과 절규의 소리가 작지 않게 사무치지만, 그 울림 안에서 지혜를 얻으려 한다. 지금처럼 매 순간 감사하고 사랑하며 내 위치에서 묵묵히 정진하다 보면, 끝내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조금이나마 친숙해질 수 있으려나.


 육신의 부패보다 빠른 것은 정신의 망각이다. 떠나간 사람은 언젠간 잊힌다. 실존에서의 소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기억 속에서 잊혀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고인들과 그 이야기들을 결코 잊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진실로 보여준 죽음의 단상들을 통하여 지금의 내가 보다 성숙해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상실의 아픔과 감동적인 순간들을 누군가 공감해주고 귀 기울여 준다면 내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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