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부터 약속된 강의가 있어서 하루는 서울로 가야만 했다.
현재 아이를 잠시라도 맡길 사람이 친정엄마뿐이다.
나의 엄마는 대단한 수다쟁이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진절머리 나게 한다.
언어발달이 느리다는 소견을 받은 나의 4세 아기는
언어치료사 선생님이 1년간 수업해도 효과가 미미했었는데
엄마의 쉼 없는 잔소리를 듣더니 말이 제법 늘었다.
작년 아동발달센터에 처음 방문하니 아이가 말할 수 있는 단어를 종이에 적으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개의 단어가 전부였다.
지금은 다행히도 다 적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식사 거부가 심한 아이라서, 밥 한 끼 먹이면 무릎이 갈려나가는 기분이다.
허리 디스크가 좋지 않은 엄마라서 더욱 힘들 것이다.
내가 떠난 사이 엄마와 아기가 지내는데, 하도 아기가 울고 불고 짜증을 내서
참다못한 엄마는 베란다로 나가 몸을 숨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가 "할머니!!!"라고 울부짖으며 온 집을 다 뒤졌다고 한다.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다시는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지 않는 게 좋겠다.
그리고 나는 이제 부를 수 있는 할머니가 없구나.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왕복 네 시간 넘는 거리를 다녀오니
귀가하여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몸살이 났다.
하지만 엄마의 투정과 아이의 눈물을 받아주려면 쉴 수 없다.
아이를 재우고 청소를 하고 나니 무릎이 유독 쑤셨다.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다.
갓난아기 때부터 할머니 품에 자라 중학생 되던 무렵
할머니 댁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로 이사를 했다.
여덟 동생과 세명의 자녀 그리고 손녀 하나 14살까지 기른 거면
참 오랜 세월 많이도 길렀다.
그래도 부족한지 다 큰 손녀딸 밥이 걱정되어서
분가를 시켜놓고도 할머니는 버스로 두 시간 거리를 매일 왕복했다.
그때는 그게 고마운 줄 몰랐다.
그냥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가 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고
밥때가 되니 밥을 차려주셨다.
엄마가 집에 있건 없건
할머니는 그걸 해야만 했다.
그 밥과 반찬이 내 입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리고 집 청소가 만족스럽게 되고 나서야
늦은 밤 할머니는 빈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내가 그 차를 타고 나서야, 몸이 아파보고 나서야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불 꺼진 거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도대체 그 밥이 뭐라고
그 밥이 뭐라고 그 고생을 했는지
무릎 연골이 다 빠져 뼈끼리 부딪히는 고통을 안고서도
왜 매일 그 버스를 타고 나에게 밥 한 끼를 차려주어야만 안도를 한 건지
게다가 같이 먹지도 않고 내가 먹을 밥상만 고이 차려둔 채 지켜만 본 건지
할머니는 왜 먹지 않냐고 물어도 연신 괜찮다고만 했는지
철딱서니 없는 손녀는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야
무릎이 아파보고 나서야 죄스러워 운다.
내가 할머니 댁에 갈 때면 밥이 이미 있는데도 압력밥솥에 새 밥을 해서
福자가 새겨진 공기에 영근 쌀을 꾹꾹 눌러 담아 이불 안에 감춰두었다.
내가 집에 오면 그것이 천년 묵은 보물인양 수줍게 꺼내서
식으니까 빨리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냥 레인지에 몇 초 돌리면 될 일을
할머니는 어미새처럼 자신의 둥지 안에 알을 품었다.
내가 먹는 것만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생선 살 발라 밥 위에 얹고 얹고
내가 사 온 롤케이크 맛 좀 보라고 하면
배부르다고만 말씀하시는데 실은 주말에 올 아들 손에 들려주랴 아껴놓지
가족들을 위한 억 겹의 밥과 반찬을 차려 냈어도
설거지할 겸 싱크대에 기대 서서 남은 반찬에 밥을 욱여넣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할머니 좀 앉아서 먹으라고 하면 다 먹었다면서 남은 밥을 단 숨에 털어 넣지
나도 보고 배운 게 이것뿐이라
나도 그렇게 살고 있소
할머니
다음 생에는 부잣집 고명딸로 태어나
남이 차려놓은 반찬 맛이 영 아니라며 투정도 내고
온갖 산해진미 찾아 여행도 다니고
예쁜 옷도 사 입고 멋진 차도 끌고요
기왕이면 결혼도 하지 말고 혼자 훨훨 살아.
훨훨 가뿐하게
징그러운 자식들 밥 걱정 이제 고만하게
훨훨 자유롭게 살아
그리고 바쁘지 않걸랑
손녀 꿈에 나와서 손 한번 잡아줘
보고 싶으니까
치매 걸린 할머니 기억 안에 갇힌 갓난쟁이 수진이가
인자 애를 낳아서 키우고 있네
내 아기는 못 안아 보고 기어이 떠나네 야속한 할머니
내가 좀 더 일찍 낳았으면 할머니가 또 아기 웃음으로 좋아라 했을 텐데
에이 그깟 손주는 다음에 보면 어때요
밥일랑 제쳐두고
그저 소처럼 할머니 할머니 부르고 싶다.
두터운 손으로 또 안아주려나
정작 할머니가 쪼그라든 풍선처럼 작아졌을 땐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참 억세게 많이도 품었소
뭐하러 그래 힘들게 살았소
나도 그렇게 살겠지만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