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꿈을 응원한다는 것
어려서부터 서점에 가는 것이 좋았다.
주말이면 집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인 광화문의 대형서점에 갔다.
꼭 책을 사기 위해서 간 건 아니고, 그 장소를 사랑했다.
책도 물론 많았지만 아기자기한 학용품들도 많았고 음반과 음식도 팔고 있었다.
내가 십 대가 되기 전부터 엄마는 나를 그 서점에 데려갔다.
매대에는 카테고리가 있다.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신간, 인문, 경제, 종교, 예술 등
보통의 아이와 엄마라면 아동서적 코너에 갈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보고 아무 데나 가서 구경하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어디 있는지만 멀찌감치 확인하고 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고른 책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학교에서 그 책을 읽으니 한 친구가 걱정스레 물었다.
"너 이거 애들이 보는 책 아닌데. 이거 어른들이 보는 거 같은데~ 네가 읽어도 돼?"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잠시 죄책감이 들어서 책 표지를 공책으로 가렸다.
그래도 읽는 걸 멈출 순 없었다. 재밌거든!!
그날도 서점에서 신나게 방황하다 입구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서점 후문 바로 앞에서 한 외국인이 돗자리를 깔아 가부좌를 틀고 책을 팔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길에서 외국인을 본다는 건 이태원에서나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 작은 돗자리에서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다리 앞에 놓인 종이 더미에 눈길이 갔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정식 출간된 책이 아니라
그가 원고를 써서 인쇄소에서 출력을 하고 제본을 한 인쇄물이었다.
책 앞에는 허름한 종이에 5,000원이라고 굵게 쓰여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책을 열어 보았다.
안타깝게도 전문은 영어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중학생 때 나는 외국 경험도 없는데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이거 저거 영화도 많이 보고, 영어를 잘하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도 있고 하니
겁 없이 말을 걸었다.
"이거 당신이 직접 쓴 책인가요?"
"응. 나는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나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했다. 이번엔 한국에 왔고 3년 정도 지냈다. 머무르면서 느낀 점을 내가 직접 책으로 만들었다."
인쇄물은 굉장히 정성스러웠다. 활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도 많았고 카툰까지 있었다.
사진도 예사로운 사진이 아니라, 디자인 작업을 한 사진들이었다.
그가 만난 한국인들의 사진과 인터뷰 내용도 많았고, 한국 문화를 풍자하는 내용도 많았다.
겉표지는 지하철 탑승구의 사진이었다.
"나는 이 책을 사고 싶어요.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과 연락하고 싶어요"
"그래. 책에 내 메일주소가 있다. 거기로 편지를 쓰렴."
주머니에서 5천 원을 꺼내 드리면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작품을 5천 원에 산다는 것은 너무 죄송스러웠다.
그 당시 책 값은 8천 원, 9천 원 대가 많았다.
그는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나는 그 책을 가슴에 품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아무리 읽어보려고 해도 영어는 어려웠다. 그때는 온라인 번역기도 없었고
가진 거라곤 전자 영어사전뿐인데, 이 많고 긴 문장들을 다 번역하기가 어려웠다.
속지는 돈을 아끼기 위한 것인지 갱지처럼 누런 색의 종이를 썼다.
무슨 뜻인지 다는 몰라도 나에게는 그 책이 보물처럼 여겨졌다.
3년 정도 지났을까 나는 여전히 서점을 방황하고 있었고
갑자기 뭔가 눈에 이끌리는 책이 보였다.
오 마이갓. 내가 3년 전에 노점에서 산 책이 정식 출간되었다.
그의 이름은 한글로 적혀있었고, 표지는 베이지 색 바탕에 제목이 적혀있었다.
내가 이렇게 덜떨어진 표현을 쓰는 이유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나의 뇌가
그의 이름과 책 제목을 기억 못 하기 때문이다!!
오늘 5시간 동안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부디 이 책에 감이 오시는 분들은 댓글을 부탁드린다. (정답자에게는 기프티콘을 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의 모습을 누군가 출판계에서 일하시는 분이 보았을 것이고
검토를 거쳐 비로소 책이 되어
서점 입구 돗자리 위가 아닌, 서점 안 매대에 진열이 된 것이다.
그의 행보가 나에게 희망이 되었다.
저 정도의 열정이면 책이 만들어지는구나.
그리고 그는 다른 나라로 옮겨 그의 남은 열정을 안배하여 쏟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구나라고 큰 가르침을 주셨다.
읽어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책의 내용도 범상치 않았다.
단순한 한국 유람, 한국 여행기를 넘어 예리한 관찰과 분석 통찰 철학이 동시에 녹아있었다.
그가 지금은 어느 나라에서 어떤 글을 쓸지 궁금해진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의 메일 기록도 찾지 못했다.
나의 기억력이여 분발하라.
내가 그때 그 돗자리 앞에 주저앉아 그와 얘기하고 그 보물을 사지 않았다면
이런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내 책이 매대에 진열된 첫날 그가 문득 생각났다.
십 대의 나에게 큰 꿈을 심어주신 분.
자신의 원고를 길에서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런 그를 발굴하여 좋은 책으로 만들어준 한 출판사.
그의 목적이 한국에서의 출판은 아니었으리라.
그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한국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을까.
요즘은 솔직히 공중파에 외국인들도 많이 나오고, 유튜브라는 창구도 있지만
그때는 인터넷 초기 시절이라 그런 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의 책을 다시 읽고 싶고,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그때 당신 앞에 쪼그리고 앉았던 여중생이 여전히 책을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고.
당신이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바라건대
나도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한 후 직장 동료에게 뜬금없이 카톡이 왔다.
이번에 신입 채용을 하는데 한 응시자의 자기소개서 귀퉁이를 찍어 보내주었다.
'000 작가의 책을 읽고 이 직업을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지원자가 합격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책을 읽고 그렇게 새로운 직업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구름은 바람 없이 움직일 수 없고, 사람은 사랑 없이 움직일 수 없다.
꿈 역시 책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