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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한아름 Jan 19. 2017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이보다 더 한 절망과 비교할 때 지금의 절망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있는 언니. 언니는 연기를 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시도와 경험을 거쳐 결국 전공한 대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빠른 연생이라 언니라고 부르지만 사실 생일은 나와 두 달밖에 차이가 안 난다. 

 나는 언니가 부럽다고 했다. 결혼하면서 서울에 올라와 딱히 정해놓은 직장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는 언니가 부러웠다. 안정적인 수입, 안정적인 출퇴근 시간과 방학까지 있는 그 언니의 삶이 부러울 법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삶일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더 부럽다고 했다. 언니에게 결혼이란 건 너무 어렵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싶지만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이 참 어렵다고 했다. 결혼할 사람을 찾고 만나는 그 시작부터가 어렵다고 했다. 부모님도 만족시켜 드려야 하고,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 하고, 경제적인 것도 맞춰가야 하고... 그 모든 것을 결국 해낸 내가 참 대단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상대방의 삶이 부럽다. 왜 사람은 내가 가진 건 잊어버리고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먼저 보는 것일까.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갖고 있는 상대방이 부럽고 때로는 질투하고 또 그걸 가지려고 그렇게도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인간은 참 간사하다'라는 표현이 이렇게 맞아 떨어지나보다. 

 우리 엄마가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아빠가 실직을 하셨을 때는 "영원한 불행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빠가 다치거나 장애를 가지거나 한건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을 때도 "운전기사가 조금만 더 늦게 나를 봤더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살아있는게 기적이야. 덤으로 살고 있는거야"라고... 다른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어 조금은 자존심이 상할 때 "신세 지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다른 가족들이 아프거나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아서 내가 보살펴야하는 입장이었다면 더 힘들었을거야" 

 이렇게 반대 상황, 혹은 지금보다 더 불행한 상황과 비교하면서 지금의 삶에 감사해하고 스스로 위로 받는 식이다. 신앙이 있는 엄마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했지만, 나는 가끔 엄마를 놀렸다. 또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그렇게라도 자신의 삶에서 좌절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참 고마웠다. 덕분에 그 힘들다는 갱년기도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다. 엄마가 우울해하고 무너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좌절했을까. 

 그런 엄마의 삶을 보고 배운 딸은 또 엄마를 닮아간다. 엄마처럼 살아간다. 남편이 마이너스가 찍힌 통장을 보며 걱정에 휩싸일 때, 다른 극단적인 사례들을 들어 위로한다. "50억 빚졌던 사람들도 결국 극복해내고, 한달에 80만원으로도 4가족 먹고 살고... 다 그렇게 살더라.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호화로운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젊고 건강하잖아. 더 벌면 되지 뭐~"  사실 나도 남편 못지 않게 걱정하고 있으면서도 남편이 걱정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까봐 천진난만한 척 이런 얘기들을 하면 남편은 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핀잔을 주기도 한다. 돈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나...

 갈수록 각박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어 주변을 돌아볼 힘이 없다. 가진 사람들은 더 가지려고 안달이다. 거짓과 욕심으로 더럽혀진 지도자들을 볼 때 절망스럽고 답답하다. 절망은 우리를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들게 한다. 다른 선진국을 보며 부러워한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어쩌면 아무도 모른채 묻혀버렸을 엄청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고 점점 더 낱낱히 드러나고 있다. 국민들은 지도자들에게 더 높은 도덕성과 더 높은 기준의 민주적 정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더 이상 그들 마음대로 이 나라를 뒤흔들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 상 누가 지도자가 되더라도 결국 각자의 이해관계와 욕심에 따라 나라를 주무를 것이라는 비관적인 의견도 있겠지마는 분명 그 전과는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다 보았기 때문이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나라에 무관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다. 우리는 이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분명 우리의 미래는 이 전과는 다를 것이다.

 더 절망적일 수 있나 할만큼 절망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다고. 결국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질 수가 없겠다고. 이렇게라도 위로해본다. 

 모든 삶은 결국 모두 아름답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 삶도 분명히 있다. 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내게 주어진 시간에는 다 뜻이 있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내게 일어나는 절망적인 순간도,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우리가 갖게 된 그 어떤 것들도,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도...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내는 건 결국 내 몫이다. 

 그 언니는 내가 지금 가질 수 없는 걸 가졌지만, 나는 그 언니가 그토록 원하는 걸 가졌다. 삶이 그렇다. 


 마지막으로 시 하나를 나누고 싶다. 송명희라는 시인이 쓴 시.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가 있어서 몸의 그 어떤 부분도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채로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고백한 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아보이는 그녀의 고백이다. 


<나>  -송명희-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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