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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한아름 Oct 30. 2019

남편과 함께 본 82년생 김지영

우리 모두가 겪은 일이지만 모두가 김지영은 아니다

 남편과 함께 보고 싶었지만 별로 좋아할 거 같지 않아 말하지 않았는데..  웬일인지 남편이 같이 보러 가자고 먼저 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토록 난리인지 궁금하다나...

 소설도 처음 나왔을 때 읽었었고(내용이 자세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영화도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 오랜만에 키보드 앞에 앉았다.


 김지영이 겪은 일을 나도 겪었으니까


 대한민국 여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눈물 흘리는 이유는... 아마도... 나도 똑같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아주 어렸던 초등학생일 때 그냥 길을 걸어가다가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게 뭐지?' 하고 상황 파악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가해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저 멀리 가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나를 욕심 내고 이용하고 추행하던 남성 권위자 밑에서 오래 참고 일해봤다. 어두운 길은 늘 무섭고, 혼자 살 때는 늘 극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지내야 했다.

 큰 아버지에게서 "계집애가 걸레질도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걸레질과 여자의 존재 이유를 동일시 당한 적도 있고, 연중 몇 번씩 엄마가 제사 음식하러 가는 길을 동행해 그 가기 싫은 큰 집에 가야했고 제사상 앞에 가기 싫어 제사 시간만 되면 여동생과 손잡고 밖에 나와있다가 들어가곤 했었다.

 결혼을 하고 6개월만에 아이를 가지면서 이제 막 내 이름으로 시작한 일들을 금새 그만두게 됐고, 아이가 좀 자라 다시 시작하게 된 일을 둘째 임신 출산과 함께 내려놓게 되었다. 남편이 회사 다니기 너무 힘들어하던 시즌에 넌지시 육아휴직 이야기를 꺼내봤다. 내가 일할테니 당신이 육아휴직을 좀 쓰면서 이직을 준비하거나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그 회사에는 육아휴직을 쓴 역사가 없다나. 현실적으로 역시 아직도 무리다.

 

 극 중에서 가장 웃프던 장면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전업맘들이 아이들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차 한잔 하자며 모였는데, 서로의 전공을 얘기하던 장면이다. 서울대 공대생이었다는 엄마는 집에서 혼자 수학문제를 풀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고, 연기 전공이었던 엄마는 아이에게 동화책 읽어주려고 연기 전공을 했나보다 하며 구연동화를 하는데 그 장면이 어찌나 웃기면서도 공감되던지...


 80년대생부터 대한민국 여성들은 웬만하면 자기 전공을 가지고 대학 정도는 다 졸업한 전문인들이다. 자기 꿈이 있고, 자기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로 모든 것이 정지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을까" 극 중 서울대 공대 출신이라는 엄마의 푸념이다.


 우리 엄마는 한 번도 내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시집 가면 평생 할 일이야. 지금은 손에 물 묻히지 마. 엄마가 다 해줄게.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원했다. 딸이 엄마처럼 살게 될까봐 그 없는 살림에도 피아노 학원 꾸역꾸역 보내고 대학도 어떻게든 보냈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자랐다. 집안 살림 같은 거 전혀 모르고 요리 같은 것도 별로 할 일 없이 공부만 하고 취직하고 커리어 쌓다가.............어느 순간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적당한 때에 결혼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너무 달라진 삶이라 괴리감이 큰 것일지도.




하지만 모두가 김지영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남편에게 웃으며 농담으로 했던 말....

"영화가 비현실적인건... 아기가 너~무 순해! 그리고 남편이 공유야. 근데 그 잘생긴 공유가 엄청 착해 또..."


영화는 소설과 다른 엔딩이다. 뭔가 변화하고 한 걸음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김지영의 변화를 보여준다.


 극 중 김지영은 많이 참고 사는 유형의 사람이었나보다. 많이 참고, 말을 아끼다보니 자꾸만 내면에 상처가 쌓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억울하고 힘든 마음이 극에 달했을 때 (그 논란의) 빙의 같은 현상이 생겼나보다. 빙의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말이 많던데... 뭐... 하다하다 빙의 설정까지 하냐는 둥의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보긴 했었다. 그냥 정신이 약해지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증상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좀 더 극적으로 보이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겠지만.



 김지영도 안다. 왜 자기만 이렇게 힘든거냐고 의사에게 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삶을 살고 있지만 다들 그럭저럭 살아간다. 씩씩하게 이겨내기도 하고, 꾸역꾸역 눌러가면서 살기도 하고, 그 나름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도 하고...

 그녀 특유의 우울한 기질이 있는 걸 수도 있고, 표현 방식이 서툴러 너무 꾹꾹 눌러 담은 탓도 있겠지만... 우리가 이 영화에 특히 공감하고 같이 우는 건... 이 영화에서 나도 보이고 너도 보이고.. 우리 엄마도.. 보이기 때문이다.



 남편도 울었다



 내가 우는거 너무 싫어하고, 자기는 우는 사람이 너무 이해가 안된다고 하지만... 의외로 마음 여려서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하는 남편인데... 난 봤다. 울고 있는 남편을.

 영화 어땠냐고 물어보니... 표현력 약한 우리 남편은 뭐 아주 뻔한 리뷰를 내어놓았다.

 "사람 사는 얘기 같아. 우리를 돌아보게 되는 것도 있고.."


 아마 남편에게 가장 마음 아팠던 건 극 중 공유(남편)의 울음 섞인 대사였을지 모른다. 아내가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남편에게 "오빠 많이 힘들었겠다.." 했을 때... 그는 말했다.

"무서웠어... 니가 어떻게 될까봐... 네가 나랑 결혼해서 이렇게 된거 같아서..."

 그렇게 흐느꼈다.


 연애 때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는 어떨 때 제일 행복해?"

"지혜가 나 때문에 웃고 행복해할 때."


 그런데 내가 결혼해서, 자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아마 남편도 많이 마음 아팠을거다.


 남편도 그런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 한정적이라 마음 아프다. 평생 마음 놓고 아프지도,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이 일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그 가장의 무게도 내가 감히 상상치 못할 무게일 것이다.




공감의 힘


 유치하게 남자가 더 힘드네, 여자가 더 힘드네 하는 싸움은 하지 말자. 그저 서로의 삶을 좀 더 이해해주고 공감해줄 수 있는 계기가 된  영화였다.

 나도 극 중 김지영처럼 힘들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털어놓으면 보통 남편은 "나도 힘들다... 나도 쉽지 않다..."는 내용의 이야기로 받아치기 일쑤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 남편이 허리 아프다 그러면 "임산부인 나보다 더 아프냐" 하며 받아친다. 유치하지만 '내가 더 힘들어'라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남편에게 이해 받고 싶어졌다. 그리고 남편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나는 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는 이 삶도 꽤 좋다.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남편에게 고맙고 따뜻한 순간들이 많다. 가족이 생겼다는 것, 이 세상에 없던 한 생명이 우리를 통해 생겨났고 그 생명을 잘 기르는 일이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삶이 이게 전부이고 싶지는 않다. 엄마로서 아내로서도 살아가지만 온전한 '나'로... 내가 하고 싶은 일, 내 존재감이 느껴지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겠지. 뒤떨어진 감각, 점점 느려지는 뇌의 기능, 아줌마라는 타이틀...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씩씩하게 부딪혀보고 싶다. 극 중 김지영도 결국 그렇게 일어나는 것처럼... 나도 지금은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고 내 손이 덜 필요해질수록... 나도 점차  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우리 엄마 세대에 비해 우리는 정말 많이 나아졌다. 할 말 마음껏 하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고, 결혼 하고 말고 아이를 낳고 말고도 충분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세대는 또 어떨까. 모두에게 더 나아진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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